이승엽 "이젠 55홈런"

08/05(목) 16:48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실제 ‘마음 먹은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국내 프로야구의 최고의 강타자 이승엽(23·삼성). 그는 꼭 1년전만해도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지난해 7월까지 그는 매달 10여개의 홈런포를 쏟아내며 이 부문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그러나 8월부터 갑작스럽게 방망이가 침묵, 결국 막판 몰아치기를 한 타이론 우즈(당시 OB·42홈런)에게 홈런왕 자리를 내주는 비운을 맛봤다. 주위에서는 “후반 체력 저하가 문제였다”고 그의 부진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 동계 훈련에 들어가기 앞서 이승엽은 “솔직히 기록 달성이 눈앞에 보이자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어깨에 무리한 힘이 들어갔고 그것이 결국 배팅 감각을 잃고 체력 저하까지 가지오는 원인이 됐다”고 털어놨다. 어린시절 유난히 고집이 강해 ‘똥고집’이라 불렸던 이승엽. 고졸 출신 프로 4년차인 그가 프로 세계의 냉혹함을 톡톡히 맛본 셈이다.

그리고 꼭 1년 뒤. 비온 뒤에 땅이 굳은 것일까. 심한 좌절과 후회의 나날을 보낸 ‘리틀 라이언’이승엽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난달 28일 한국프로야구 한시즌 최다홈런 타이기록(42홈런)을 달성하더니 이젠 ‘꿈의 기록’인 50홈런도 단숨에 뛰어넘을 태세다. 지금 그의 몸은 비호처럼 날렵하면서도 사자의 묵직한 힘이 실려있다. 그리고 그의 방망이는 마치 새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정교하다. 프로 입문 5년만에 최고의 절정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승엽이 지난해와 달라진 것은 바로 그의 마음자세다. 올시즌 그는 조급하지 않다. 크게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지난해 “반드시 40호 홈런을 달성하겠다”외쳐댔던 이승엽. 그러나 올해 그는 “팀 성적이 우선이다. 개인기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고 여유를 부린다. 그만큼 성숙했다.

사실 배팅에 관한한 이승엽은 천부적인 재질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장점은 상대 투수나 구장, 타구 방향을 별로 가리지 않는 전천후 타자라는데 있다. 지난해 우즈가 124경기만에 세웠던 한시즌 최다홈런기록을 올시즌 그는 불과 94경기만에 이것을 해냈다.

일반적으로 아웃코너에서 낮게 파고드는 볼은 대부분의 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구질이다. 이런 볼은 가볍게 밀어치는 타격법을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장타가 나올 확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더구나 끌어당기는 타법을 구사하는 장타자들로선 가장 곤혹스런 구질이다. 오른손 타자의 경우 우월 홈런이, 왼손타자는 좌월 홈런이 드문 것이 바로 이런 이유다.

그러나 이승엽에겐 코스 자체가 의미가 없다. 왼손타자인 그는 한시즌 최다 홈런기록을 세운 42호까지 중월 홈런이 14개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우월 13개, 우중월 7개, 좌중월 4개, 그리고 좌월도 4개나 됐다. 투수의 투구 방향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홈런을 만들어 냈다. 역으로 보면 상대 투수가 마땅히 던질 곳이 없다는 이야기다.

홈런을 쳐 낸 투구 구질도 다양하다.

이승엽의 홈런중 절반인 21개가 직구를 받아 친 것이다. 23일 그가 처음으로 시즌 첫 40호 홈런을 날린 볼도 한화 정민철의 시속 146㎞에 달하는 빠른 직구였다. 그만큼 배트 스피드가 빠르고 선구안이 좋다는 증거다. 전문가들은 “당시 그 볼은 확실하게 제구력이 뒷받침된 완벽한 볼이었다. 국내에서 이 정도의 볼을 쳐서 담장을 넘길수 있는 선수는 이승엽 뿐이다”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다음으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각 6개, 포크볼이 4개를 기록하고 있다. 이어 커브와 투심이 각 2개, 싱커가 1개로 나타났다. 투구의 방향 뿐아니라 투수의 구질도 이승엽에겐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분석이 나온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이승엽은 정확한 선구안과 빠른 스윙 스피드, 그리고 거기에 유연한 허리가 뒷받침돼 어느 하나 나무랄데 없는 타고난 선수”라 평가하며 “그를 상대하려면 최소 150㎞에 달하는 강속구에 완벽한 제구력을 갖춘 왼손 투수 정도는 돼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승엽에도 아킬레스 건은 있다.

‘리틀 라이언’이승엽이 상대하기 가장 곤혹스런 투수는 한화의 구대성. 타격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는 이승엽도 국내에서 제일 빠른 구질을 지닌 왼손투수인 구대성을 만나면 맥을 못췄다. 올해 12차례 대면해 단 하나의 안타나 홈런도 못친채 삼진만 9번을 당했다. 특히 구대성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파고드는 빠른 직구에 이승엽의 방망이는 매번 허공을 스치고 말았다. 또 현대 최창호와 롯데 성준에게 이승엽의 마술 방망이는 심통치 안았다. 이승엽 ‘천적 3인방’은 모두 왼손 투수에 제구력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승엽도 여느 선수처럼 헛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를 최대한 보완하려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승엽을 타격 천재로 평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예전의 이만수 김성한 장종훈, 그리고 최근의 우즈, 샌더스 등과 같은 용병들처럼 파워 배팅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81㎝,78㎏의 그리 큰 체격도 아니지만 감각적인 스윙 리듬과 유연하면서도 강한 허리 덕에 웬만한 타구는 훌쩍 담장을 넘겨 버린다.

김응룡 해태감독은 “이승엽은 공을 끝까지 보면서도 힘들이지 않고 홈런을 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선수”라며 “고교시절 투수를 한 적이 있어선 지 선구안도 월등하게 좋다”고 칭찬한다.

이런 타고난 능력만으로 국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순 없다. 이승엽은 이런 재능에 ‘훈련 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자기관리에도 치밀하다. 특히 지난시즌말 체력적인 부담을 인식했는지 올해는 웨이트 트레이닝에 더욱 충실히 임하고 있다.

이제 이승엽의 다음 목표는 64년 왕정치(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일본프로야구에서 세웠던 시즌 55홈런기록 경신. 현재의 페이스라면 이승엽은 이 기록도 충분히 넘어설 수 있을 만큼 몸과 정신이 충만해 있다.

물론 투수들이 ‘하필이면 내가 불명예의 주인공이 될 이유가 있나’하는 생각에 정면 대결을 피한다면 기록 달성은 위축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날 뿐 아니라 모처럼 기지개를 켜고 프로야구붐에 찬물을 붓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프로야구는 최근 2~3년간 급격한 관중 감소 등 전에 없는 불황을 맞고 있다. 이런 위기에서 ‘스타 탄생’은 그 어느 것보다 강한 흡입력을 지닌 흥행 요소다. 지난해 전세계적 윌드스타로 떠오른 미 메이저리그 세인트 루이스의 마크 맥과이어의 예를 보더라도 정정당당한 대결은 그 어느것보다 아름답고 멋지다. 국내팬들도 오랜만에 나온 타격 천재가 찾잔 속의 태풍으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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