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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오지트레킹-강원도 인제 조경동

새벽비가 추적거렸다. 비옷을 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우산을 펴들었다. 배낭에는 비닐봉지에 싼 카메라와 비상식량인 초콜릿, 오이 각 두 개.

“차를 몰고 갔다간 그 곳에 폐차로 남겨두기 십상이고, 열심히 걷는다면 해질녘에는 돌아올 수 있을거요.” 민박집 아저씨의 말만 듣고 용기를 내긴 했지만 불안했다. 시골 사람들이 어림하는 거리라는게 언제나 도시인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는 3가구가 사는데 외출이 잦단다. 자칫하면 오지에서 배를 곯며 밤을 지새워야 할 판이다. 전기는 물론 전화도 없다.

강원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조경동. 강원도 골짜기 중에서도 상 골짜기이다. 정감록에 기록된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삼둔(살둔 월둔 달둔) 사가리(아침가리 명지가리 곁가리 연가리)가 이곳에 있다. 임진왜란은 물론 한국전의 피비린내까지 용케 피했지만 삼척·울진 무장공비침투사건 때 공비 4명이 사살되고 주민 1명이 희생됐다. 조선조 단종의 폐위를 정면으로 반대했던 한 선비가 세조의 눈길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살둔에 정착하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한때 조경동에만 20여가구가 있었는데 이제 원주민은 모두 떠났다.

월둔교(홍천군 내면 광원리)를 건넜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 울퉁불퉁 크고 작은 바위가 깔려있어 4륜구동차라도 경험많은 운전자가 아니면 힘들 듯하다. 물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러나 옆은 무성한 잡목숲. 계곡물을 보려해도 한발짝도 들여놓기 힘들다. 길이 계곡을 가로지르자 비로소 계곡물은 속살을 드러냈다. 한 치의 티끌도 없는 맑은 물이 이끼 낀 검은 바위를 휘돌아 내린다.

5~6㎞를 걸었을까. 높은 언덕이 나타났다. 월둔고개다. 이곳부터는 인제 땅이다. 꼭대기에서 왼쪽의 가파른 임도를 타면 야생화 군락이 펼쳐지는 구룡덕봉(1,388㎙)에 오를 수 있고, 조경동은 직진 내리막이다. 명지가리, 아침가리를 관통하는 이 길은 지난 비에 군데군데 쓸려내려갔다. 절벽을 타고 겨우 몸을 옮길 정도의 공간만 남았다. 이제 계곡과 자주 만난다. 월둔교로 흐르는 계곡보다 규모도 크고 물도 많다. 커다란 웅덩이가 보인다. 어림잡아 깊이가 5~6㎙는 됨직하다. 몽땅 벗었다. 발만 담갔을 뿐인데 머리에 현기증이 인다. 물은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아플 정도로 시리다. 무언가 발가락을 톡톡 건드린다. 돌피리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사람 무서운 줄 모른다. 돌을 들추니 까만 가재가 우글우글하다. 내리막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됐다. 끝이 안보이는 직선길인데 옆의 잡목이 자라 하늘까지 가렸다. 눈을 감았다. 새소리, 풀벌레소리가 어지럽다.

출발한 지 5시간이 흘렀다. 뭔가 인공의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보인다. 폐교된 방동초등학교 조경분교이다. 40대 중후반으로 짐작되는 털보아저씨가 집을 지키고 있다. 그냥 이곳이 좋아 10년째 살고 있는 사람이다. 마당에는 두대의 4륜구동차가 서 있다. 오프로더들인데 현리 쪽에서 넘어왔단다. 배를 곯기는 커녕 그들이 싣고 온 돼지고기를 벽난로에 굽고 갖가지 약초로 담근 술까지 얻어 마셨다. 금방 몽롱해졌다. 술도 독했지만 눈에 가득한 원시의 자연은 뼈마디까지 풀어놓는 것 같았다. 절절하게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다. ‘나도 이곳에서 살고 싶다.’ 권오현 생활과학부 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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