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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본 21세기 정치]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서기 2000년하고도 몇 년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예전 한때 국토 남쪽의 운동권에서 ‘통일 염원 몇 년’, 혹은 ‘조국분단 몇 년’하는 식의 연호를 썼던 것처럼 올해가 바로 ‘조국통일 30년’이 되는 해라는 것만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그러기 전 남북 당국자는 3년 간의 시간을 들여 통일 이후에 대한 모든 사항을 하나하나 협의했고, 통일 조국의 헌법 또한 그런 협의를 거친 다음 남북한 전국민의 투표로 제정되었다. 이 때의 통일 방식을 훗날의 사가(史家)들이 다시 어떻게 정의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당시엔 남북 당국자간의 ‘합의 통일’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1000년의 시작과 함께 무르익기 시작한 통일 논의과정에서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통일 방식은 전쟁을 통한 ‘침략 통일’과 경제력에서나 군사력에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힘의 우세로 이루어내는 ‘흡수 통일’ 두 가지 방식 밖에 없었다.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말 자체가 곧 힘을 길러 흡수통일을 이뤄내자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쪽 당국자들 입장에서는 힘에 밀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는 일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라는 것은 단어 하나에까지 명분을 따지는 일이어서,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말을 쓴 적이 없는 ‘합의 통일’이라는 말을 어느 한 쪽이 제의했고, 다른 한 쪽이 그 말을 받아들여 ‘통일 합의문’에까지 이 역사적 통일의 성격을 ‘합의 통일’이라고 명시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합의한 남북 최고 당국자는 그해의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도 예나 지금이나 어느 방면이든 그 방면의 전문가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건 경제에서도 그러하고 정치에서도 그러하다. 예전에 비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땅에 대기업들의 수는 날로 늘어나도 지난 세기의 유물과도 같은 ‘재벌’은 그런 말과 함께 이미 사라져버렸다. 통일과 함께 군사분계선이 없는 나라가 되었듯 거대 족벌기업군이 없는 나라가 된 것이었다.

통일 후, 정치에서도 처음엔 뭔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은 기미는 있었다. 지난 세기의 60년대 말 남쪽에서 불었던 ‘40대 기수론’처럼 ‘50대 중심론’이 잠시 바람을 타는 듯했다. 지역 감정 역시 처음엔 주춤하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과 함께 행정구역 역시 예전의 지역 감정을 고려해 인위적으로 많은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공룡처럼 거대하진 서울을 네 개의 독립된 지방 정부로 나누고, 또 그간 지역 감정이 제일 극심했던 영호남 지역을 인위적으로 재편해 경상남도를 남해동도로, 전라남도를 남해서도로 변경하는 식으로 영호남이라는 말 자체를 가급적 쓰지 않는 쪽으로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는 우리 국토 중 그곳만 서해를 끼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서해북도와 서해남도라는 이름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역시 동해북도와 동해남도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경기도 역시 한강을 중심으로 경기남도와 경기북도로 나누고, 분단 시절 남쪽 땅으로 예전의 행정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곳은 충청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예전 충북지역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변화는 북쪽 땅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 역시 관북과 관서간의 지역감정을 고려해 행정지명들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고 또 어색한 점도 많았으나, 국민들은 지역 이름에서의 그 혼란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통일 후에도 지역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치판에서 ‘50대 중심론’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통일 5년 후의 일이었다. 처음엔 합의 통일을 이룬 남북 최고 당국자가 공동 정부를 운영하듯 모든 힘을 자기들 앞으로 집결시켰다. 통일을 이룰 때 그들의 나이는 이미 70이 넘은 때였고, 5년 후 그들은 7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정치권의 젊은 바람 얘기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현실적으로 그 힘은 미약했었다. 그러다 공동 정부 집권자들의 2차 임기를 2년 앞두고 누군가의 입에서 주창된 ‘50대 중심론’, ‘40대 주비론’이 국민들 사이에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 바람은 신선한 것이었다. 남쪽 출신의 새로운 대통령 후보와 북쪽 출신의 새로운 부통령 후보가 짝을 지어 ‘50대 중심론, 40대 준비론’의 바람을 말 그대로 백두에서 한라까지 불게 한 것이다. 남북 공동 정부 당시 그들이 야당이었기에 그 바람은 더욱 신선했던 것인지 모른다. 국토의 균형발전, 인재의 균등발굴, 선거에서 그들이 내건 모토였다. 대선에서 뿐 아니라 다음해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그들은 대승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제 예전에 자신들이 공격하고 몰아냈던 70대 후반의 노 정객들이 된 것이다. 한 번 정권을 잡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는 것, 그것도 예전과 다름없이 갖게 되는 그 방면의 욕심이었고, 또 현실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한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당을 만들어내며,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것. 앞에서도 어느 방면에나 그 방면의 전문가라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에서도 끊임없이 당을 깨고, 다시 새로운 당을 만들어내는 정당 제조기의 전문가가 있는 법이다. 바둑에서의 9단은 입신(入神)의 경지라고 한다. 정치에서의 9단은 그가 보여주는 정치력보다 언제 어느 때고 자기 마음대로 당을 깨고, 당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예전엔 지역 감정을 등에 업고 겁도 없이 그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지역에서의 지지만 업고 새 당을 만들어내기엔 너무 명분이 약하다. 말 그대로 통일 시대의 통일 정당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 전문가들의 수법들도 바뀐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자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로는 후원금에 의한 정치라고 했지만, 여전히 물밑으로는 뭉치돈이 필요했고, 또 뭉치돈이 오고가는 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활동자금으로서의 ‘오리발’이라는 말과 선거 때 단기간에 퍼붓는 ‘실탄’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정가에서 쓰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필요에 의해, 또 자기 이미지의 변신을 위해 이제까지 자기가 몸담았던 기존의 정당을 깨고 새로운 당 하나를 하루 아침에 새롭게 만들어 내자 해도 무엇보다 많은 돈이, 아무도 몰래 관리해야 할 ‘비자금’이 필요한 실정이었던 것이다.

단지 지난 세기의 정치권에서처럼 그것이 무식하지 않게 오고가는 차이 뿐이다. 지난 세기엔 그것이 사과 박스로 오고 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오로지 현찰만이 은밀할 수 있었고, 또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이미 새로운 세기가 도래한 지금은 음성적인 정치자금이 오고가는 방식 역시 달라져 있었다. 사과박스에 현찰을 담아나르는 방식은 말 그대로 옛날의 일이 되고, 새로운 현찰의 자리를 차지한 ‘전자 머니’들이 아주 은밀하게 유령계좌의 인터넷 계정으로 오고 갔다. 정치 자금을 받는 방식도 그랬고, 그것을 `오리발'이든 `실탄'으로 분배하는 방식도 그랬다.

서울 지검 특수부 검사 함기욱은 어느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열어본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해커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했다. 아니, 그건 흔적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홈페이지의 머리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그곳에 있어야 할 자신의 사진 위에 누군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인분 사진을 올려놓고 달아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자신의 얼굴 위에 똥을 싸고 달아난 꼴이었다.

우선은 홈페이지가 해킹당했다는 것보다, 그 오물이 그대로 자신의 얼굴 위에 깔려 있다는 것 때문에 그는 사무실의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 하고 한 번 놀란 다음 서둘러 접속을 종료하고 나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함께 일하는 입회 계장이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라기보다…"

"그럼…"

왜 놀라냐는 뜻일 것이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더러 검사들의 홈페이지가 해킹당한다는 얘기는 듣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겪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누군가 장난으로라든가, 예전 자신이 검거했던 범죄자 중 누군가가 단순한 앙심만으로 그렇게 해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무렵 그는 아무도 몰래 지금 집권당인 ‘남북하나당’의 지난해의 대선자금과 올 봄의 총선 자금을 인터넷을 통해 역추적하던 중이었다. 단지 자신 혼자만 은밀하게 추적하는 일이라 그럴 리가 없다 싶으면서도 누군가 냄새를 맡았다는 뜻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면 최 검사도 이땅의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이쪽 판에서는 철옹성이라고 불리는 미국 FBI 홈페이지까지 열두 대문을 열어 해킹해 들어갔다 나온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곳에서 무슨 자료를 해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들 두세 개의 대문도 뚫고 들어가기 힘들다는 그곳을 자신은 몇 대문까지 들어갈 수 있나 실력을 점검해보기 위해 가장 벽이 두껍다는 그곳을 내 집처럼 들어가 휘저어본 것이다. 그리고 흔적없이 그곳을 빠져나왔었다.

이렇게 내 홈페이지와 들어와 내 이미지 컷에 똥까지 싸고 나간 것이라면 침입자는 분명 자신의 흔적을 일부러 남겼다는 뜻이다. 컴퓨터 안에 내장된 자료들 역시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전 그는 어딘지 모를 인터넷 밑바닥에서 예닐곱 개의 전자머니 터미널을 발견했었다. 처음엔 국제적으로 연결된 지하 조직들의 지하자금 터미널인가 생각했었다. 처음 그것을 한 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한 기업에서 흘러들어간 물품대금 지급 내역서를 따라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그가 발견한 고구마 줄기의 첫잎인지 몰랐다. 큰 기대없이 겉으로 드러난 잎 하나를 들췄을 때 그 뒤에 줄줄이 따라 일어서는 다른 수많은 잎들과 그 잎들을 단단하게 연결하고 있는 줄기 하나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1,500억 원이 넘는 돈이 국제 인터넷 뱅크에 연결되어 있고, 그 터미널에서부터 또 한가닥의 고구마 줄기가 다른 터미널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이 나라 집권당의 수장이 관리하는 비자금 터미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거기에 연결된 터미널 모두 지난해 대선 무렵과 총선 때 집중적인 거래와 집중적인 자금 이동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거래 내역들을 보다 면밀하게 분석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 터미널로 자신이 들어가 보았던 흔적 같은 것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것에 대한 확증을 채 잡기도 전에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홈페이지로 해킹해 들어와 거기에 비록 사진으로 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얼굴에 인분을 깔리고 달아난 것이었다.

그는 잠시 후, 다시 자신의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여전히 자신의 얼굴 위에 인분 오물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메뉴를 선택하기 전인데도 ‘방명록’ 쪽에 인지(人指)를 펼친 손모양의 그림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방명록’을 클릭했다.

"이제 오셨군. 나요, 함 검사."

어젯밤 자신이 접속을 종료한 다음 새로 올라온 게시물이었다.

그는 그 제목에 커서를 옮기고 클릭했다.

“함 검사, 당신 예전에 광고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지요. 그러면 여기에 당신이 좋아할 만한 아주 예전의 광고 필름 하나 올려놓지요. 그걸 본 다음 앞으로의 일에 대한 판단은 함검사 스스로 하고.”

그는 해커가 올려놓은 ‘첨부 자료’를 클릭했다. 그러자 거기엔 지난 세기의 말인 1999년에 제작되어 그해 광고계의 한 유행을 탔던 한 PCS통신의 광고 동영상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나 가르쳐주는 번호 하나와 오직 한 사람에게만 가르쳐주는 번호 하나가 있다.”

남자:몇 번인데.

여자:알려고 하지 마, 다쳐…

남자: 뭐. 닥치라고?

여자: 아니, 다친다구…

그리고 그 광고 아래 다시 뜨는 문구 하나.

“많이 알면 많이 아는 것만큼 다치는 속도도 빨라진다. 그 시절 또다른 함 검사도 그랬으니까.”

시간이 가면 세상이 변할 거라구?

웃기지마라.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여전히 당을 깨고 당을 새로이 만드는 정당 메이커 전문가들과 그 사이로 오가고 스며드는 정치 자금의 세계는.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또 믿지 않고 싶을 뿐이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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