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님들, 그 약속 믿어도 될까요"

09/01(수) 16:18

‘군신맹약(君臣盟約)’

말 그대로 임금과 신하가 약속을 맺는다는 뜻이다. 이는 형식상 임금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며, 신하는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왕조시대의 통치이념과는 사뭇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임금과 권력을 쥔 신하들은 ‘군신맹약’을 통해 서로의 신뢰와 충성을 확인하곤 했다. 실제로 고려말 허수아비 임금이었던 우왕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신하인 이성계에게 굴욕적 내용의 ‘군신맹약’을 먼저 요청했고, 반대로 ‘무서운 독재자’였던 태종 이방원은 군신맹약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인했다.

8월25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5대그룹 총수가 모여 “재벌의 선단식 체제를 끊고 독립기업 또는 소그룹으로 재편하겠다”고 발표한 합의문은 ‘임금’이 ‘정부’로, ‘신하’가 ‘재벌’로 바뀌었을뿐 현대판 군신맹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발표된 합의내용 역시 놀라운 것들이다. 정부와 재계는 그동안 추진해온 대기업 구조개혁 5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제2금융권의 지배구조 개선 및 경영건전성 강화 ▲계열사간 순환출자 축소 및 부당내부거래 방지 ▲변칙 상속·증여의 방지 등 3대 개혁과제를 추가한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전략을 내놓았다.

정부와 재계는 이를 담보하기 위해 7개항의 실천사항까지 내놓았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하고 결합재무제표를 통해 순환출자를 억제하고 ▲재벌들이 제2금융권을 사금고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며 ▲이사후보 추천위원회를 설립, 지배구조개선을 통해 소유·지배의 분리를 가속화하며 ▲부당한 부의 세습화를 막아 경영능력이 검증되지않은 재벌2세의 경영권 확보를 막겠다고 밝혔다. “정말 진정한 재벌개혁이 가능하겠구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이다.

약속이행에 부정적 시각 많아

그러나 정부와 재벌의 ‘맹약’이 제대로 지켜질지에 대해서는 긍정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오히려 역대 정권이 바뀔때마다 압박을 받아오면서 나름대로 면역성을 길러온 재벌들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이번 합의안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완화된 것”이라는 점은 비관적 전망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특히 출자총액제한제도를 2년후에나 부활시키고 제2금융권에 대한 재벌의 지분소유제한도 중장기적 과제로 미뤄놓았다는 점은 2년후인 2001년이 정권말기라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 압박을 받을수록 정교해지는 재벌의 ‘반 개혁논리’도 장애임에 틀림없다. 8월15일 재벌해체 파동이후 “재벌의 해체는 규모와 범위의 경제가 가져오는 효율성을 박탈하고 위험과 모험이 따르는 대규모 투자를 가로막는 동시에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등 부작용이 많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재벌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의 반증이다.

불과 5.4%의 지분을 갖고 있는 총수들이 나머지 94.6%의 지분을 좌지우지하는 재벌체제. 왕조시대 ‘군신맹약’의 결과가 군주의 역량에 따라 달라졌듯이, ‘현대판 군신맹약’에 참가한 재벌들이 자신의 손과 발을 자르는 약속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여부는 상당부분 사심없고 일관된 정부정책에 달려 있는 셈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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