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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남에게 없는걸 갖고 있다는 건 희열이죠"

“그냥 뉴스만 들어도 바로 어떤 신문사에서 호외가 나올지 딱 감이 잡혀요. 밭을 매다가도 라디오에서 ‘긴급뉴스입니다’‘화재가 났습니다’ 이러면 농사고 뭐고 어디있어요. 다 집어던지고 서울로 달려가는거지요. 서울 올라가면 제가 도는 코스도 따로 있어요. 서울신문사에서 출발해서 동아, 한국, 조선, 경향, 중앙, 신아일보까지 돈 다음 서울시청앞으로 오죠. 그럼 거기 대한일보가 있었거든요. 늘 그 코스였지요. 어렸을 땐 참외 농사짓는 집에서 새가 쪼을까봐 참외마다 신문지를 씌워놓으면 그것까지 야밤에 가서 다 벗겨오고… 결국 그 해 그 집 참외 농사 다 망쳤잖아요, 저 때문에. 지금도 참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열심히 모았어요.”

그렇듯 ‘죄’도 짓고, 욕도 먹고, 상처까지 입어가며 끈덕지게 모았다. 40여년 이색수집광으로 살아온 이승언(54)씨. 워낙 정신없이 모으다 보니 본인도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는 형편이다. 대충 생각나는 종류만 크게 잡아도 20종류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아끼는 신문호외나 옛 잡지, 등사 시절의 방송편성표 등은 외부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곧잘 꺼내드는 ‘접대용’ 애장품.

넘쳐나는 수집품, 둘곳 마땅찮아 애물단지로

둘 곳조차 마땅치 않은 애물단지다. 보관할 곳이 모자라 온 수집품을 도처에 흩어놓고 산다. 현재 그가 향토사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경기 시흥시청 향토사료실에만 50여개 박스, 역대 선거때마다 모아 온 이 선거홍보물 등속을 정리하는데만 인부 몇사람 손을 빌고도 2주나 걸렸다. 두해전 옮겨온 시청 구사옥에는 봉고차 1대분의 수집품이 남아있다. 가까운 친척집 아파트 지하실에 ‘객지살이’를 시킨 것도 2대분. 현재 행사중인 ‘20세기 한국 스포츠 1백년사’ 전시장에 ‘출장’중인 것도 상당량이다. 언젠가 한자리에 모아 정리할 일은 생각만해도 까마득하다.

이씨가 본격적인 수집에 나선 것은 중학교 2학년때인 58년 무렵. 한문선생님이 워낙 무서워 성적을 올리려고 신문을 찾아보던중 수집에 취미가 붙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시절 전력도 있다. 52년 취학통지서를 비롯, 자신이 받은 성적표, 공책, 교과서 등을 지금까지 보관중. 시험지 한 장을 더 얻기위해 시험 때만 되면 답안지도 맨먼저 제출하고 교탁위의 여분 시험지를 들고 나오던 학생이었다.

눈에 띄는 건 뭐든 집안으로 끌고 왔다. 종이면 종이, 성냥이면 성냥, 좁은 그의 집안은 금새 잡동사니로 들어찼다. 가족도 나중엔 손을 들었다. 언젠가 그가 모은 기왓장 수십장을 부친이 비오는 날 진흙탕길을 덮으려고 인심좋게 마을 길바닥에 깔았다가 그가 질겁을 해 회수한 적이 있고, 또 어느날엔가는 애써 모은 신문지가 방 도배지로 둔갑, 부자지간에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결국 물을 묻혀 떼낸 일도 생생하다. 이렇게 40여년동안 ‘멀쩡한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가며 치른 ‘전쟁’이 그에겐 정말 무궁무진하다.

예비군훈련 받다 호회 받으려고 ‘탈영’도

“선거때면 무작정 밀고 들어가 홍보물을 챙기다 멱살도 많이 잡혔어요. 박대통령 서거 때는 예비군훈련 받던 중에 사태가 터져서 그 호외받으려고 예비군복차림 그대로 정신없이 신문사에 들어갔다가 지키고 있던 계엄군들에게 붙들려 아주 혼이 난 적 있습니다. 이 손가락의 흉터 (왼쪽 검지)도 30년전 땅바닥의 호외를 집다가 다른 사람 구두발에 밟혀서 생긴 것이죠. 몸만 상한게 아니다. 수집품을 살 비용을 대느라 악동짓도 여간 많이 한 게 아니다.

“용돈이 어디있어요. 학교 다닐 땐 제 방에 쌀가마니가 있었는데 거기다 대나무 자루를 몰래 찔러서 쌀도 받아 팔고, 개구리 잡아서 오리키우는 집에 갖다 팔고, 나무도 베어서 팔고, 아버님껜 참 죄송한 일인데, 아버님이 글을 잘 못 읽으시거든요. 그래서 정 급할땐 아버님도 속였어요. 마치 학교에서 보낸 통지문처럼 ‘이번에 교과서가 바뀌니 책대금을 내라’고 거짓말로 써서 친구집에서 네모 도장까지 빌려 찍은 뒤(학교장 직인흉내) 돈을 타내곤 했어요. 이래저래 아버님께 죄 많이 지었습니다. 나중엔 아셨지만, 어쨌든 제가 허튼데 쓰는게 아니란걸 알고는 그냥 눈 감아주셨죠.”

들인 돈이 여간 아니지만, 전혀 ‘본전을 찾을’생각은 없다. 그가 갖고 있는 희귀본들 가운데 1908년에 발행된 ‘대한협회회보’만 해도 수집 당시 쌀 세가마니 값을 주고 산 것. 그 것을 얼마전 아파트 한 채 값을 주겠다며 팔라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파트 한 채가 아니라 몇 채를 줘도 절대 안 팝니다. 옛날에 그렇게 돈없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도 절대 안 팔았던 것들입니다. 그때고 지금이고 이 수집품들로 돈을 벌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듯 팔 생각도 없는 물건들을 수십년씩이나 악착같이 모은 이유는 뭘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걸 갖고 있다는 것, 남들에겐 없는 것들이 내겐 있다는 것, 혹은 누구보다 내가 많이 갖고 있다는 그런 희열’때문에 그는 평생을 맞바꾼 것이었다.

수집엔 ‘도사’지만 돈 모으는 재주는 ‘바닥’

수집엔 도사라도 돈 모으는 재주는 바닥이다. 도무지 ‘재운’이 따르지 않는다. 27세때 배추장사를 했을 땐 그 해 따라 배추풍작으로 애써 가꾼 트럭 2대분을 그대로 썩혔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 졸업후 몇 개월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한 경력이나, 대한전선에 잠시 다닌 이력이 그나마 ‘안정기’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아 주저없이 귀향, 한참동안 농부로 살았다. 77년엔 결혼도 했다. 그러나 취직이 어려워, 1년간 궁색한 실업자로 살았다. 나중엔 쌀값도 대기 어려워 결혼예물까지 모두 팔아 썼다. 주머니가 텅 빈데다 갈 곳도 마땅찮아 1년동안 하릴없이 국립묘지에 ‘출근’하며 살았다. 돈 없이 하루를 버티는 최후의 방법이었다. 식사라곤 당시 푼돈짜리 과자인 라면땅에 물 몇모금. 특별히 시간을 보낼 방법도 없어 하루종일 몇십만기의 무덤 비문들을 읽으며 살았다.

79년엔 전 가족의 재산을 걸고 서울 여의도에 골동품 상점을 냈다. 그러나

완전히 실패했다. 천상 사업체질도 아닌데다 골동상 시작 1주일만에 율산실업 부도, 금당사건(국내 골동품업계에 불황을 몰고온 한 인사동 골동품상 부부 살해사건), 유가폭등, 10·26 사태, 민주화의 봄, 광주민주화항쟁 등이 두어달 간격으로 연쇄폭격처럼 터지는 통에 사업이 될 리가 없었다는게 그의 분석. 저당잡혔던 집안의 전답 2,500여평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동네사람들은 ‘사깃군’이라 손가락질 했다. 산더미같은 빚과 달려드는 채권자들을 피해 그는 10년동안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빚쟁이가 찾아올까봐 집이며 가족도 찾아보지 못한 채 내내 바깥으로 떠돌아다녔다.

다행히 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서울의 한 연기학원에서 3년간 숨어지냈다. 1년 내내 같은 양말, 같은 옷에 새우잠을 자며 가슴엔 유서를 품고 다녔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전히 빚쟁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름까지 필명으로 바꿨다. 40여년 신문을 읽으면서 쌓아온 지식, 그리고 신문의 기사만으로도 모자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현장에서 배운 향토사에 대한 기록이었다.

“운명이란게 있긴 있나 봅니다. 85년초 어느 일간지에 우리 시흥에 대한

역사얘기를 기고한게 있었는데, 당시 시흥군에서 군지(郡誌)를 만들 사람을 찾다가 우연히 제 기고문을 본거예요. 그런데 필명으로 바꿨으니 아무도 알턱이 없는데, 마침 그 기사를 읽은 공보실직원이 바로 제 친구여서 드물게 제 사정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군청에 들어오게 됐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거죠. 군지를 완성했을 때 처음으로 고향 제사에 참가했습니다. 젯상에 그 13kg짜리 군지 세권을 올리고 절을 할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아마 이해 못할겁니다.”

첫 월급이 40만원. 부인은 한참을 울었다. ‘정말 당신이 가져온 월급 맞냐?

또 얼마뒤엔 갚아줘야 될 돈 아니냐’며 감격에 겨워했다. 수집에다 고향 역사 공부에만 정신을 쏟았을뿐, 월급다운 월급이라곤 벌어본 적이 없는 이씨였기 때문이었다.

별정직공무원 14년, 노후 생각하면 걱정 앞서

별정직 공무원 생활도 14년째 접어드는 이씨는 직장에서 그리 인기있는 인물은 아니다. 술(잠이 안 와서 마시는 막걸리 한두잔은 예외), 담배, 고기라곤 평생 입에도 안대는 데다 동료들 경조사 때도 웬만하면 부조금만 건넬 뿐 도무지 술마시며 어울릴줄도, 잡기(雜技)도 모른다. 동료들이 모이는 회식자리란 회식자리는 대부분 결석, 시계추처럼 집과 직장, 도서관만 오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인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시 태어날 땐 당신과 결혼 안하겠다”는 ‘원망’만 수시로 듣는다. 너무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출근전이든 퇴근후든 종일 책만 껴안고 사는데다 그나마 주말이면 어김없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수원시립도서관으로 직행. 늦게 얻은 아들 상언(8)군을 돌보느라 요즘 타박이 좀 줄어든게 그에겐 다행이다.

사실상 그의 인생 50여년에서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작품은 그의 아들일 것이다. 한 번 갖고 싶은 수집품이 생기면 그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 밤잠을 못자던 그지만, 아들 상언을 얻는데는 10여년이나 속타는 세월이 걸렸다. 한 번 인사하면 동네 아파트가 다 울린다는, 잘 생긴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볼 때마다 요즘은 전에 없던 걱정도 있다. ‘애비는 늙었고, 물려줄 재산도 하나 없는게 심히 미안한’ 그는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정직하고 올바른 정신이라도 물려주는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도 갖가지 자료는 물론 허드레 광고전단지까지 모은다는 그는 헤어질 무렵 이메일과 온갖 첨단 통신기능이 추가된 자신의 최신형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비록 아직도 육필원고를 고집하고, 책더미, 신문더미에 묻혀 살고 있지만, 세상의 변화란게 얼마나 빠른 것인가를 그는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었다. 책속에, 아니 신문속에 그렇게 ‘길’이 많았던가 새삼 놀랄 지경이었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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