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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전의 사회상] 컴퓨터 국내 첫선, 인터넷은 꿈도 못꿔

1964년 9월27일 週刊한국이 국내 시사주간지의 새 지평을 열던 날 국내 일간지들은 1면 머리에 일제히 ‘정부, 日의 2천만불 延拂借款 受入방침 確認’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당시는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해제한 지 두달이 채 안됐던 긴박했던 시기. 5~6월 보릿고개에 한숨이 깊었던 그 시절, 박 전대통령은 ‘원조가 아닌 상업차관’이라는 대외 명목을 대며 일본 차관을 끌어 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굴욕적 대일외교’의 전초였고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일제의 만행에 대한 상흔이 많이 남아있던 때였다. 그리고 꼭 35년 뒤인 지난주 정부는 일본 문화 확대 개방을 선언했다. 확대개방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있기는 하나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지금의 분위기다.

60년대 중반의 사회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 얼음판을 걷는 형국이었다. 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反共) 이데올로기’로 철권 군사통치 시대를 열었다.

언론은 첫번째 감시 대상이었다. 당시에는 신문이 나오기전에 군검열관에게 기사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국내 모든 일간지 1면 하단에는 예외없이 ‘全面軍檢畢(전면군검필)’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박정권은 같은해 8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추진하다가 ‘선심’을 쓰듯 취소하기도 했다. 또 간첩혐의로 체포됐던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던 26명은 중부경찰서 등으로 끌려가 전기고문, 물고문, 몽둥이 구타 등 심한 고문을 당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64년은 미터제로 계량법이 통일된 해 였다. 고무신 치수 단위였던 문수(文數)는 센티미터로 변하게 됐고 말·되·홉이었던 체적 단위도 공식적으로는 리터(ℓ)로 바뀌었다. 그 때는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상상 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조악한 컴퓨터가 처음으로 국내에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도 추석은 가장 큰 민족 명절이었다. 빈부 격차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당시 부유층들은 백화점에서 500원에서 5,000원까지 하는 상품권이나 고급 아동복을 선물하는게 유행했다. 일반 서민들은 사과 한봉지나 한근에 140원 가량했던 쇠고기를 선물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설탕이나 소금, 조미료인 미원 등이 선물로 인기를 끌었다.

60년대 중반에는 현재와 같은 물가 불안은 별로 없었다. 당시 쌀 한가마가 상(上)품 기준 3,100원(이하 64년 9월 서울 기준)으로 현재(약 17만원)의 50분의 1이 채 안됐다. 국제 화폐 가치의 척도가 되는 금 1돈(3.75g)은 1,400원에 불과했다. 또 19공 연탄은 1접(100개)에 700원, 보리쌀은 100리터에 2,300원, 밀가루 27㎏에 650원, 달걀 10개에 99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설탕이 30㎏에 5,500원, 고무신은 10컬레에 840원 하는 등 농수산물에 비해 가공 제품이 가격은 상대적으로 비쌌다. 우리의 열악한 산업현실 때문이었다. 당시 국내 시사주간지 시장에 새바람을 몰고왔던 週刊한국은 1부당 10원, 월 40원이었다. 일간 신문은 1부당 5원이었고 월구독료는 100원이었다.

현재는 전세계가 하나되는 위성방송 시대가 도래했지만 당시만해도 아직 텔레비전이 활성화되기 이전이라 TV 채널은 KBS(채널9)와 미군 방송인 AFKN(채널 2·12) 두 군데에 불과했다. 물론 흑백이었고 서울 수도권과 중요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 지방은 난시청 지역이었다. 라디오는 KBS 제1,제2 방송, 동아방송, 기독교방송, 라디오서울, 문화방송 등 5곳이 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은 각종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신문에 의존했고 문화 생활은 영화가 담당했다.

당시 영화관은 오히려 소극장 형태인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 됐다. 대한, 중앙, 국제, 명보, 스카라, 세기, 명동, 을지, 금성, 오사카, 화양, 남대문 등 개봉관들이 즐비했다. 60년 중반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는 주로 신파조 멜로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64년 신상옥감독의 ‘빨간마후라(신영균 최은희 주연)’와 ‘벙어리 삼룡이(김진규 박노식)’, 63년 이만희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장동휘 최무룡 주연)’, 유현목감독의 ‘김약국집 딸들(엄행란 주연)’, 65년 김수용감독의 ‘갯마을(고은아 신영균 주연)’등은 당시 젊은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 인기 작품이다. 당시는 야외 유랑극장도 상당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최근 타계한 후라이보이(곽규석)와 구봉서 명콤비가 TV와 극단에서 인기를 모았다. 가수로는 ‘엘리제의 여왕’ 이미자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은방울 자매, 아리랑 부러더스 등도 자주 TV에 등장했다. 현재 유행하는 댄스 음악과 달리 당시는 가창력에 따라 인기 척도가 갈렸다. 국악 공연도 활발해 박호월, 김소희 등이 판소리 흥부가 등을 국립극장 무대에서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스포츠에 대한 열기는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여건이 없는 상태에다 박 전대통령이 국민들의 정치에 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스포츠를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프로레슬링을 적극 지원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레슬링을 배운 김일은 온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또 64년 9월 현해탄 건너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동경올림픽서는 장창선이 은메달을 따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9월28일 국내 첫 18홀 정규 골프장인 ‘한양칸트리구락부’가 정식 개장, 고급 스포츠의 새장을 열었다. 경기 고양군 원당면에 전장 6,650야드의 파72홀인 이 골프장의 회원가는 예치금 23만원, 입회금 13만원, 잔금 10만원 등 총 46만원에 달해 웬만한 재력가들도 감히 엄두를 못낼 만큼 고가였다. 이 골프장은 이후 정객들과 재력가들의 사교장으로 애용돼 왔다.

아직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기 이전 어려웠던 그 시절, 해외 취업은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중의 하나였다.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중의 하나는 독일에 광부나 간호사로 떠나는 것이었다. 정부는 광부 공개 모집을 실시했고 선발된 합격자를 신문 지상에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여자 간호사들 중에는 대학을 마친 고학력 지원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미모의 대졸 여학생들에게는 자유롭게 외국을 나갈수 있는 국영 대한항공공사(KAL·대한항공의 전신)에 취직하는 것이 꿈이었다.

전차가 종로통을 관통하고 길가에는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울려 퍼지던 35년전 그시절. 비록 풍요롭지도 못했고 정치현실은 암울했지만 꿈과 낭만, 그리고 소박한 멋은 넘치던 사회였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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