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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활빈단 홍정식 단장

간단한 공통 연상 퀴즈 하나. 때밀이 수건 3,000장, 몸빼바지 18벌, 촌지반납봉투 1만장, 청백리열전, 신사임당전기와 신명심보감. 이들에 공통으로 대입되는 이름은 뭘까. 답은 ‘활빈단’이다. 판검사와 장관부인들은 물론 옥중에 있는 임창열 경기지사와 주혜란씨 부부까지 찾아간 활빈단 명의의 전달품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답을 맞춘 사람이라면 평소 신문이나 잡지를 여간 정성들여 읽는 정독파가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이름이 웬만큼 알려진 지금에도 활빈단에 대해 ‘정체 묘연해’하는 사람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활 쏘는 모임이냐, 아니면 전과자 집단이냐 별별 얘기가 다 많습니다.

혹은 좀 뭘 안다는 분들은 홍길동의 활빈당 얘기까지 꺼내시던데 그것도 아닙니다. 활빈단은 말 그대로 빈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곳입니다. 그저 작은 힘이나마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사회정의를 바로 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지요. 남 잘사는 게 배아픈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은 더 잘살기 운동, 부자는 부자대로 좀 더 존경받는 부자가 되자는게 우리가 하는 일이지요. 제가 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까 홍길동의 활빈당으로 소문난건지는 몰라도요.”

활빈단 단장 홍정식(49)씨. 그는 오가는 곳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소문난 뉴스메이커다. 할 말도 많고 갈 곳도 많은, 참으로 요란한 사람이다. 공직자 비리가 터질 때마다 그와 활빈단의 ‘튀는’ 행적은 어김없이 언론 한 구석에 동반등장, 그를 두고 현대판 홍길동이나 돈키호테, 혹은 현대판 박문수라고 부르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의 ‘최신작’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지난 2월 대전 법조비리사건때 “묵은 때를 벗기라”며 판검사들에게 보낸 때밀이 수건. 또 최근 옷로비사건이 터지자 “사치 대신 진정한 사회봉사나 하라”며 고매하신 장관부인들 앞으로 보낸 몸빼바지 등이다. 그외에도 각급 관공서를 다니며 벌이는 촌지반납운동에다 터키난민돕기운동, 최근엔 재일교포 무기수 김희로씨의 석방을 앞두고 경호업무까지 맡기로 해 더더욱 알려진 ‘시민 인사’가 돼 있다.

그에게 쏟아지는 가장 많은 질문은 ‘운동자금’이 어디서 나오냐는 것. 사실상 경제적으론 ‘무직자’인 그에겐 별다른 사업비 조달처도 없다. 전직 공무원 출신, 연금과 퇴직금으로 생활하면서 한때는 신문배달로 번 돈 30만원을 매달 활동비로 쏟아붓기도 했으나 그 일마저 지난 6월에 그만둔 뒤 이젠 맨몸으로 뛰고 있다. 최근엔 부인 몰래 생명보험도 해약, 간간이 생기는 강연료나 출연료까지 보태는 것이 자금의 전부다. 그 빈털털이 살림에도 그만큼 ‘무적함대’처럼 씩씩할 수 있다니, 어쨌든 타고난 배짱파에 낙천가임엔 틀림없다.

‘괴짜’라는 이름에만 이견이 없을 뿐, 그에 대한 평가도 천차만별이다. 워낙 기상천외한 발상이 난무하는 탓에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인물평이 교차한다. 그중에서도 그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수시로 자극하는 ‘고관대작’들 쪽이다. 신념과 오기만 믿고 나아가다가 험한 꼴도 많이 당했다. 일껏 만들어 보낸 ‘촌지반납봉투’는 한동안 보내지는 낱낱이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졌고, 전직 대통령들에게 사회봉사동참을 촉구할 때는 아예 비서관들에 의해 원천봉쇄당한 뒤,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세상에 너 혼자만 의롭냐”“넌 깨끗한 인생 살았냐”“네 가족 명 길지 않을거다. 남 죽여서 좋을거 없다”는 익명의 욕설과 협박도 숱했다. 심지어 파주 근무시절엔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많으면 한달에 두번 이상 퇴근 때를 골라 칼을 든 괴한이 찾아든 것. 다행히 고교시절 배워둔 당수실력으로 위기를 모면, 한동안 파주경찰서에 신변보호요청을 했던 적도 있다.

또다른 봉변도 있다. 한 번은 서울역 노숙자들을 돕겠다고 정성껏 생필품을 준비해갔다가 오히려 난데없는 폭행을 당했다. 가져간 물품이 적다며 돈을 더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순수한 노숙자가 아니라 ‘걸인연합회’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엔 ‘가난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일어설 의지가 있는 사람만 돕겠다’는 게 새로운 신조가 됐다.

“솔직히 참 피곤하게 산거지요. 그저 용각산같이 살았더라면,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고’ 그렇게 입 다물고 있었으면 아무 탈없이 편안하게 살았을텐데. 그런데 그게 안되는 겁니다. 시쳇말로 ‘젊은 피’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피 자체가 ‘끓는 피’인 것 같습니다.”

충북 중원군이 고향인 그의 조부는 ‘교과서에만 안 나왔을뿐’ 일제치하 독립군을 지원하던 어른.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씨가 먼 친척뻘쯤 된다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는 한국전이후 영등포경찰서 사찰계 노동담당 형사 출신, 어머니도 ‘고집’하면 알아주는 강씨, 말하자면 자신의 뚝심과 고집도 내력같은거다. 어릴적부터 집안엔 걸인들과 소년범들이 하숙생처럼 진을 치고 살았다. 경찰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그들을 데려와 입히고, 먹이며 취직자리까지 구해 자립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배운게 많았다.

‘원칙파’ 기질은 학창시절부터 두드러졌다. 50년대 초등학교 시절엔 어린이 교통정리반을 하면서도 신호를 어기고 지나가는 차량이나 자전거만 보면 겁없이 ‘몸을 던져’ 막다가 혼나기 예사였다. 68년 중앙고 재학시엔 당시 민족차별에 항거한 재일동포 김희로씨 사건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다른 고교생

2,000여명과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대사관을 습격했던 의분의 애국청년. 당시 신문을 장식했던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한때 비누사업을 벌인 부친은 부도와 함께 홧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웠고, 그 병바라지에다 다섯명의 동생들, 더부살이하는 사촌들까지 거의 10명의 부양책임을 떠맡느라 평생 고생속에 살았다. 고교 졸업후엔 워커힐호텔, 조선호텔 등에서 나이트클럽 웨이터보조로 일했다. 그 와중에도 “일본인 팁은 받지 않겠다”며 ‘독야청청’하다가 동료종업원들로부터 따돌림받은 전력이 있다. 결국 그런저런 마찰 끝에 “보이가 보이답지 않으니 나가달라”는 지배인의 말을 끝으로 그 벌이가 좋던 호텔맨 생활도 마감.

그후 공무원시험에 합격, 76년 육영수여사 총격사건의 여파로 김포세관의 인원교체가 이뤄지던 무렵, 세관공무원의 길에 들어섰다.

첫 근무지인 김포세관에서도 해외로 나가는 홀트아동복지회의 입양아들을 보고 가슴마다 작은 태극기라도 만들어 붙여주는 등, 수시로 그런 일만 쫓아다녔다. 79년엔 밤무대 가수 겸 김밥장사로도 뛰었다. 당시에도 순직선원 유가족돕기운동 하랴 대식구의 가장노릇 하랴, 깨끗한 봉급만 지키는 사람들로선 여지없이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낮엔 공무원으로 일하고, 퇴근후엔 근처 술집의 밤무대에 올라 10시까지 아마추어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그 일이 끝나면 곧바로 김밥바구니를 들고 신림동, 봉천동 일대를 돌며 장사를 했다. 남의 시선은 어떠했든, 벌이는 좋았다. 그 장사 1주일 벌이가 공무원 한달 봉급을 웃 돌 정도였다. 2-3년을 그렇게 살았다.

35세 되던 해에 결혼, 만혼으로 얻은 아들 범희(연서중1)과 딸 재희(신사초등5)는 두말할 것 없이 ‘그 아버지에 그 자녀’다. 태극기달기 운동 건의서를 보내는 것을 비롯, 생일 때 친구들에게 학용품 대신 쌀을 선물로 받아 결식아동들에게 보내면서 어린이 봉사상까지 받은 ‘가족 봉사대’.

92년 말, 대선 무렵엔 자신이 속한 세관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세도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95년엔 정도회로, DJ가 취임하던 작년 98년엔 행여 홍길동의 ‘의적’냄새라도 풍길까하여 ‘준법’이란 말을 꼭꼭 박아넣은 ‘준법 활빈단’으로 또한번 이름을 바꾸었다.

그의 직장생활은 사실상 그리 편치 않았던 듯 보인다. 직장에 다니면서 방송대를 졸업,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95년, 단지 통일문제에 관심이 쏠려 다니기 시작한 당시 야당총재 DJ의 아태 아카데미공부건이 우연찮게 알려지면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결국 보도된지 며칠만에 ‘북향좌’ 명령을 받고 파주감시소장으로 보내졌다. 사실상 좌천. 그런데 파주로 옮긴 뒤에도 지난 4월5일 황희 정승의 묘역에서 ‘부패와의 1,000일 전쟁’을 선포하는 등, 튀는 행적은 여전했다. 상사로부터 “당신 때문에 조직이 흔들린다”는 힐난도 들었고, 실제로 윗분들에게 본의 아닌 부담도 끼칠 것 같다는 판단에 그는 지난 3월 ‘눈물을 머금고’ 명예퇴직했다.

“그래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나마 박봉의 국가공무원이라도 됐으니 망

정이지 그렇지않았다면 교도소를 들락날락했을겁니다. 더러운 걸 보면 도무지 가만있질 못하니 어디 편안히 살았겠습니까. 그나마 안정된 직업이라도 갖고 지금껏 내 인생에 빨간 줄 하나 안 긋고 살았다는 데 감사합니다.”

실속없이 쫓기는 것도 당분간이다. 최근 관세사 자격증을 취득, 가능하면 올 10월이라도 개업해 한 생활인으로서의 역할도 더 충실히 되찾을 예정이다. 불과 20명을 넘지않던 활빈단 회원수는 현재 146명까지 불어난 상태. 비록 지금은 한국일보사 독립문지국 사무실을 함께 쓰는 빈한한 형편이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회원들 덕에 그의 목소리도 한층 힘이 실린다. 그중에도 독립문지국장겸 활빈단 기획국장이기도 한 김덕리씨는 홍씨가 “우리시대 최고의 애국열사”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든든한 동지. 돈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는 활빈단 재산이 그에겐 많다.

먼 훗날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작은 학교라도 세우고 “교장이 될만하면 교장

으로, 그도 아니면 도덕선생이나 하다 못해 수위라도” 되겠다는 게 그의 최종목표다. 한편으론 요즘같은 ‘유명세’의 여세를 몰아 광고에 출연, 그 수익으로 자금을 비축할 궁리를 하고 있는 그에게 얼마전 당략만 일삼는 국회의원들에게 보낸다던 밴댕이 젓은 보냈는가 물어봤더니, 그 대답은 아주 짧았다. “이번 청문회 동안 국회의원들 하는거 봐서!” 누가 받게 될지는 몰라도, 받느니보다 안 받는게 더 기분좋은 ‘선물’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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