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개봉1, 2호를 기록한 ‘하나-비’(花-火)와‘카게무샤’(影武者). 해방후 53년만에 찾아온 일본영화다. 우리에게 이 두 영화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베니스와 칸영화제 최우수작품. 현대물과 시대극, 폭력과 죽음을 벚꽃과 일본색채가 짙은 그림으로 은유했고 사무라이들이 전쟁을 벌이는 영화

. 일본 최고의 엔터테이너 키다노 다케시(北野武)와 9월 세상을 떠난 일본 영화계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일본영화로서는 가장 자랑스런 두개의 얼굴이었다. 걸핏하면 우리가 굴욕적인 역사, 정체성을 들먹이며 거부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그것이 가질 힘과 매력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잔뜩 긴장했었다. 극장에 걸리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니면 이미 몰래 일본대중문화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몰릴 것이라고. 더구나 미국이 스크린쿼터 폐지까지 주장하고 있으니 손에 물 안묻히고 그 덕을 볼 것이 아닌가.

예상은 일단 빗나갔다. 5일 개봉한 ‘하나-비’는 2주동안 서울서 4만명의 관객 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일본언론들만 야단법석을 떨었다. 여기에 호기심, 작품성, 감독의 유명세까지 생각하면 흥행실패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30대 이상이 관심을 보였다. 12일 개봉한 ‘카게무샤’역시 요란스럽지 않다. 젊은이들 보다는 중, 장년층 관객이 많다.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너무나 얼굴을 자주 내밀어 3,000명에 가까운 마니아가 빠져 나가서? 영화가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지 않아서? 끔찍한 폭력이 싫어서? (하나-비) 아니면 18년이나 된 낡은 것이어서? 사무라이 나오는 것이 역겨워서? 아니면 기대보다 작품성이 떨어져서?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서? 시대극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어서? (카게무샤)

그 어느 것도 정확한 답이 아니다.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이런 분석도 있다. 우리나라 관객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만 골라본다. 그러면서도 사회 분위기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애국적인 사안에서는. 6월에 있었던‘고질라’에서도 분명히 나타났다. 극장에 걸린 우리영화 ‘여고괴담’을 반강제로 밀어내고 들어오자 여론은 미국의 횡포에 분개했다. 결국 ‘고질라’는 기대이하의 성적으로 끝났다.

지금도 비슷하다. 범영화인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들고 일어난 ‘스크린쿼터 축소, 폐지 결사반대’가 있다. “한국영화가 죽는다”는 외침이 영화팬들의 귀에 들린다. 그것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 것은 우리가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경제기구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마움도 있지만 속상함도 있다. 그래서 외국영화에 냉담하다. 최근 외화가 5만명을 넘지 못하고 한결같이 흥행에 참패하는 것이나, 11월14일 개봉한‘약속’이 4주만에 전국에서 120만명이 모여 한국영화 사상 최단기간 최다관객 기록을 세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일본영화는 겁낼 필요 없으며, 한국영화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만큼 잘 만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다. 이와이 순지(岩井俊二)의 ‘러브 레터’‘4월의 이야기’나 스오 마사유키(周防正行)의 ‘셀 위 댄스’같은 젊은 감각의 영화들이 족쇄가 풀리길 기다리고 있다. 문이 활짝 열리면 우리가 늘 욕을 해대는 저질영화도 들어 올 것이다. 그것이 더 무섭다. 부정적이고 말초적인 문화가 더 강하다. 또 하나 착가하지 말자. ‘약속’의 기록은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다. 울고 싶은 요즘의 분위기에 편승한, ‘한국영화의 퇴행, 퇴보’라는 비판도 있다. 귀담아 들어야 한다. 언제나 한국영화가 애국심만으로 버틸 수는 없지 않는가.

이대현 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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