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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전쟁] "세상을 뒤집어 엎고 싶을때도 있어요"

“가을 하늘도 좋은 줄 모르겠다. 하늘 만큼이나 마음이 뻥 뚫린 것 같다.”

긴 늦더위 끝에 성큼 다가선 가을도 L군(94학번·24)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눈치다. L군은 이른바 ‘취업 재수생’이다. 올해 2월 서울의 S대 산업심리학과를 졸업한 뒤로 무려 12번 취업원서를 내본 경험을 갖고 있다. 면접까지 갔으나 떨어진 게 절반쯤 되고, 최종결과가 나오기 전에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L군은 초등학교를 또래보다 1년 앞서 들어간데다 군복무를 면제받아 연령제한 걱정은 없다. 하지만 올 연말에도 여전히 어두운 취업전망에 또다시 ‘3수’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사는 맛을 잃었다고 한다.

“올 추석때 고향(부산)에 내려가서 부모님 손을 꼭잡고 ‘대학원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학원 진학이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취업에 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말씀드린거죠.”

비명문대출신에게는 여전히 바늘구멍

경제가 호전되면서 대기업 신입사원 모집 인원이 1만2,000여명에 달해 지난해보다는 취업사정이 좋아질 것이라는 소식도 그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출신도 엄청나게 적체된 상황에서 비명문대 출신에게 돌아올 자리가 몇개나 되겠느냐는 게 그의 반문이다. 지난해 삼성과 대우에서 각각 1,000명씩 뽑은 인턴사원도 서울대와 연·고대 출신이 독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비명문대 출신)는 경쟁력이 없다”고 말했다. 명문대 출신 우선의 사회현실에 대한 불만도 짙게 배여 있다.

L군의 실패는 졸업전인 지난해 말부터 시작됐다. 대우증권에 지원해 ‘운좋게’ 2차면접까지 갔지만 끝내 고배를 마셨다. “서울대, 연·고대 석사 등 비까번쩍한 지원자들이 수두룩했다. 평범한 졸업 예정자인 저로서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1차를 통과한 것은 회사측이 나를 (명문대 출신자들을 위한)들러리로 세우기 위해서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몹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인맥을 통해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 적도 있었다고 한다. “막상 들어가고 보니 실력이 안되더라”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지금까지 배운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잡일만 하게 됐다는 것이 조기퇴사의 이유였다. L군 이때 ‘좀더 공부해 필요한 지식을 쌓은 뒤 입사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올해에도 대기업에 들어 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20~30만명이 1만2,000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데다 학력, 영어실력, 자격증 취득 여부 등에서 어느 것 하나 월등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대기업 채용기준을 따라 가려면 밑도 끝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회사나 들어갈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업직도 마다는 않겠지만 ‘사꾸라 영업’이 많은 세상이라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L군은 지금 심정같아서는 창업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세상을 다 때려 뒤집어 엎고 싶을 정도로 울분이 치밀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일부대학만 편애하는 교육정책에 불만

그는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대학원 육성을 위한)‘BK21(두뇌한국21)’은 일부 대학에 연구자금을 몰아 주어 나머지 대학은 다 죽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BK21로 인해 비명문대 졸업생의 취업이 더 어려워 질 것으로 보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신대학과 학과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내가 나온 대학도 좋은 대학이다. 학과도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선택한 곳인 만큼 후회는 없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 8개월간 취업재수를 하다보니 집에서는 “미운 오리새끼 꼴”이 됐다고 한다. “기껏 공부시켰더니 취직도 못한다. 졸업했으니 자립해야 할 것 아니냐”는 부모님의 말씀에 용돈 타기에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한달 지출은 약 40만원. 방세와 음식값을 빼고 남는 10~20만원이 용돈이다.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공부시간을 뺏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한다. 친구들 중에는 낮에는 공공근로장에서 돈을 벌고 밤에는 취업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이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애인이 없지만 주변에서는 취업실패로 인해 틀어지는 커플을 많이 보아 왔다고 한다. “깨지는 커플도 많지만 새로 생기는 커플도 많다”는 것이 그가 보는 취업난 시대의 남녀관계 풍속도다.

L군은 주로 집에서 공부한다. “도서관 가기도 부끄럽고 해서 집에 틀어박혀 나만의 방법으로 공부한다”는 이야기다. 가끔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과 만나 신세타령이나 하며 소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인문계열 학생들은 취직할 생각도 않고 한숨만 쉬고 있고, 더러는 촉탁직으로만 취직해도 다행이라는 등의 이야기와 모습이 술자리의 풍경이다. 그래서 친구들 중에는 전공을 디자인으로 바꾼 사람도 있고, 공무원 시험과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 경제 좋아질때 기다리겠다

L군이 취업정보를 얻는 곳은 주로 PC방이다. 그는 이제 인터넷을 통해 구직정보를 체크하는데는 거의 ‘도사’가 됐다고 말했다. 포털사이트에 떠있는 1,000여개의 구인란을 제목만 쭉 보고도 어떤 회사인지 감을 잡는다는 것이다. 한창 원서를 쓸 때는 자신의 사진파일은 물론이고 자기소개서 양식까지 독자적으로 만들어 회사의 성격에 맞춰 이메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리크루트 관련 잡지 보다는 인터넷이 취업정보 수집에 훨씬 유용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보수집과 실제 취업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인터넷에서 수많은 회사를 살펴 보았지만 입맛에 맞는 곳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괜찮다 싶으면 요구조건이 너무 까다롭고, 입사가 비교적 쉬운 곳은 대우와 장래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L군이 대학원에 진학키로 한 것은 취업에 유리한 대학원에 들어가 경제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며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면 아무래도 한국의 사정이 많이 나아질 것이다. 대학원에서 2~3년 준비하면 대체로 시기가 맞아 떨어진다.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아무데나 취직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현재 자신의 사회적 처지를 ‘실험용 쥐’와 같다고 말했다. “나는 산업구조가 바뀌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구조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속에서 실험용 쥐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낀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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