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삼성] 동업, 갈등, 그리고 배신

10/20(수) 20:00

세계 초일류 강대국인 미국에게도 ‘백인의 인디언 사냥’이라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듯이 한국 최고의 재벌인 삼성에게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과거가 있다. 미 대륙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개척’이라는 명목아래 인디언을 고향에서 몰아낸 것처럼 삼성그룹 역시 일류기업으로의 도약과정에서 동업자와 사돈과의 의리를 배신한 아픈 과거가 있다.

60년이 넘는 삼성그룹의 역사에 최초의 동업과 결별로 꼽히는 사례는 삼성그룹 이병철 선대 회장과 효성그룹 창업자인 조홍제 전 회장과의 만남과 이별이다. 청년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이회장과 조회장이 동업을 시작한 것은 해방직후인 1948년 12월. 당시 이회장(혜화동)과 조회장(명륜동)은 걸어서 3~4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무역업을 하던 이회장이 조회장에게 1,000만원의 사업자금을 빌리면서 동업이 시작됐다. 이후 조회장은 이회장의 제의에 따라 빌려준 돈을 출자로 전환, 이회장이 세운 삼성물산공사의 전무가 됐다.

동업을 시작한 이회장과 조회장은 정신없이 뛰었다. 간판을 내건지 1년만에 정부에 등록된 무역업자 543명중 7위에 랭크됐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1953년 2월에는 42억환(1953년초 화폐개혁으로 화폐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다)의 수익을 올렸다. 두사람은 삼성물산을 기반으로 1953년 7월 설탕을 생산하는 제일제당을 세웠고, 54년 9월에는 제일모직도 설립했다.

특히 제일모직 공장설립에 필요한 기자재의 발주는 조회장의 책임이었다. 설탕 사업과는 달리 초창기 어려움을 겪던 제일모직은 드디어 골덴텍스 신화를 낳으며 화려하게 재기했고, 무역업을 하던 삼성물산도 번성했다. 시중은행의 주식절반은 삼성소유였고, 안국화재·천일증권·한국타이어·동양제당 등에도 투자했다. 동업을 시작한지 10년만에 이회장과 조회장이 이끄는 삼성은 재계의 최고봉에 올라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삼성과 효성그룹의 운명적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1960년 3월 이회장과 조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회동, 조회장이 제의한 동업의 청산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나 지분문제로 두 회장간의 의가 갈라서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결산 당시 이회장과 조회장의 지분은 각각 66대33이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 와중에 잠시 주춤하던 이회장과 조회장의 지분협상은 1962년 5월부터 다시 시작됐다. 조회장은 “내 지분이 3분의 1이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제일제당중 1960년부터 사장으로 지낸 제일제당을 갖겠다”고 제의했다. 이회장 역시 처음에는 “그게 좋겠다”며 임원배분 의견까지 내놓았으나 며칠뒤 안국화재, 한국타이어 등에 투자한 제일제당의 지분처리를 이유로 들며 지분양도를 차일피일 미뤘다.

급기야 이회장의 처사에 분노한 조회장이 1962년 9월 삼성과의 결별을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재산문제는 더 이상 진척이 없었고 조회장이 갖고 나온 재산은 달러 공매에 참여하기 위해 설립한 종이회사 효성물산뿐이었다. 이후 이회장과 조회장을 결코 화해하지 않았다.

삼성과 효성의 결별이 15년 동업자의 헤어짐이었다면 1965~1968년의 삼성과 락희그룹(현재의 LG그룹)의 갈등은 사돈끼리의 동업과 결별 때문에 벌어졌다. 락희그룹 회장인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세째 아들 자학씨와 둘째 딸인 숙희씨가 1957년 결혼함으로써 사돈관계였다.

사돈그룹인 삼성과 락희가 운명의 동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역시 삼성 이회장의 제의로 시작됐다. 1964년초 이회장이 구회장에게 “금성사 라디오가 잘 팔린다는데 우리 둘이 같이 방송국을 만들어 경영해 보지 않겠나? 물론 라디오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방송까지 포함이 된다네”라고 제의했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만들 계획을 세워놓고 있던 구회장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사돈의 제의인데다가 방송국이 있어야 제품도 팔릴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에서였다. 결국 1964년 5월9일, 당시 국회의사당이 있던 태평로 안국화재 빌딩에는 두 그룹이 반반씩 투자한 ‘라디오 서울’방송국이 화려하게 들어설 수 있었다. 또 그해 10월에는 ‘채널 7’로 텔레비전 전파도 발사했는데 이것이 ‘동양 TV방송국(TBC)’이다.

그러나 사돈재벌 끼리의 동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신설 방송사인만큼 경영을 뒷바침 할 광고수입이 많을 수 없었고 자연히 경영은 어려웠다. 게다가 양 그룹에서 동수로 파견된 임원진 간에 의견충돌이 잦았다. 삼성을 대표한 홍진기씨와 락희를 대표한 이흥배씨를 중심으로 임원진이 구성, 화합을 모색했으나, 불화의 골만 깊어갔다.

결국 타협책이 제시됐다. 라디오 부문은 삼성이 맡고 TV부문은 락희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쉽사리 결론나지 않았다. 락희에서 라디오를 청산하고 TV만을 맡기위한 인수단을 파견했으나 당시 도쿄에 있던 이회장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사돈그룹간의 우의가 사업으로 깨지게 됐다는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구회장이 도쿄로 날아간 것은 당연했다. 사돈끼리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서 였다. 구회장은 이회장에게 “TV국을 넘겨주겠다던 약속을 실행에 옮겨주게. 양가의 불화설이 장안에 퍼져 창피하이. TV까지 할 생각이라면 아예 모두 인수하게. 양가에서 태어난 우리 손자의 장래를 생각해서 일세”라고 말했다. 이회장은 “그대로 같이 해보세”라고 말했으나 결국 라디오와 TV부문 모두 삼성으로 넘어오게 됐다.

이렇게 해서 1965년 9월, 사돈그룹간의 방송국 합작사업은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삼성과 락희그룹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였고, 1968년 이회장이 1년여동안의 공백(1966년 9월 한국비료 사건으로 이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을 끝내고 경영일선에 복귀하면서 락희의 주력 업종인 ‘전자업종’으로의 진출을 선언한뒤 이병철과 구인회라는 두 거물 경제인은 서로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끝내 화해하지 않았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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