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씨가 마른다] 생명자원은 부가가치 지닌 지적재산

10/20(수) 20:22

수년전부터 세계 화훼시장에는 낮선 이름의 신품종 하나가 일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바로 ‘미스김 라일락’. 처음 꽃봉오리가 맺힐 때는 진보라색을 띠다 봉오리가 열리면서 옅은 라벤더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만개하면 강렬한 향기를 내며 백옥같이 하얀색으로 다시 변신한다. 혹한 지방에서도 잘 견딘다. 그야말로 라일락의 여왕이다.

이런 신비한 자태 때문에 가격은 일반종의 두배에 달하는 30달러나 하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내 라일락 시장의 30%를 장악하고 있는 이 꽃은 놀랍게도 한국산이다. 미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였던 미더가 1947년 11월 북한산 백운대 836m의 한 바위틈에서 세찬 바람속에서도 살아남은 털개회나무의 종자를 발견해 이중 12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가 싹을 틔우는데 성공한 것이다. 세계 라일락 육종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미스김’이라는 명칭은 다름아닌 당시 미더를 도와주던 한국인 여성 타이피스트의 성을 딴 것이다.

토종식물 해외로 밀반출, 이젠 역수입

외국인의 이같은 노력과 달리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답은 우리의 토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만 ‘신토불이’를 외치고 있을 때 바로 이 땅에서 수만년을 뿌리박고 살아온 우리 고유의 꽃과 약초, 가축, 곤충들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토종의 상당수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외국으로 밀반출돼 다시 역수입되는 웃지못할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자연 생태계가 심각히 손상됨은 물론 우리 고유의 것들이 외국인들에 의해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변해 우리에게 되돌아 오고 있는 것이다.

매년 5월이면 영국 템즈강변에서는 세계 최대의 꽃 박람회인 첼시 플라워쇼가 열린다. 각국의 내로라하는 화원들이 한해동안 정성껏 가꾼 꽃과 관상용 나무 3,000여점이 저마다 최고를 자랑하며 전시된다. 이 곳에서도 미스김 라일락의 인기는 단연 최고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외에도 우리 고유의 꽃과 관상수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비추, 백합(날개하늘나리), 산딸나무, 내장산 단풍나무, 지리산 구상나무, 호랑가시나무 등. 모두 우리 토종들을 외국산과 접붙이거나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한국산’들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이 벌써 외국에서는 안방까지 들어와 우리의 세포조직을 조금씩 떼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식물 표본조사가 1931년 일본 총독부 소속 식물조사원인 나카이에 의해 행해진 이후 70년이 다된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그 실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유품종 배타적 지적재산권 인정

이처럼 선진국들이 앞다퉈 신품종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동식물 고유 품종에 대한 특허권이 21세기 농·축산업의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92년에 체결된 생물다양성협약을 통해 이제는 농·축산업도 배타적 지적재산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미스김 라일락의 원종인 털개회나무에 대한 품종특허를 받아 놓았더라면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미스김 라일락 판매에 대한 로열티를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손하나 안대고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열대의 무더위와 한대의 혹한이 모두 존재하는 뚜렷한 4계절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는 생태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종이 서식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물론 열대우림이나 한대지역 같이 굵고 곧게 뻗은 상업성이 높은 산림은 드물지만 한반도에는 강추위와 혹서를 견뎌낼 수 있는 내성과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 많다. 꽃이나 관상수 같은 분야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종은 대략 4,200여종.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것이 407종이나 된다. 그러나 이들 한국산 자생식물중 260여종이 이미 미국과 캐나다 등 해외에서 재배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중 상당수 식물은 이미 신품종으로 개량돼 상품화됐다.

한국 자생식물을 연구해온 성균관대 조경학과 심경구교수는 “자생식물중 교목(줄기가 곧고 위에서 가지가 펴지는 나무) 119종중 망개나무, 왕개서어나무, 긴잎팝나무 등 3종만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으로 넘어갔다. 키작은 나무(Shrubs)나 덩굴나무(Vines) 142종중 10종을 제외한 나머지도 모두 이들이 재배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토종식물 수집·보존, 이제 걸음마

선진국은 이미 100년전부터 식물자원 수집과 보존에 힘을 쏟았던데 비해 우리는 이 토종식물이 ‘자원’이 될 것이라는 것 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유럽에 우리의 토종이 마구 유출되는 것을 그대로 방치했다. 올해 4월 강원 속초시는 프랑스 국립산업과학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환경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하는 설악산의 보호야생식물의 하나인 둥근잎꿩의비름을 무단 반출했다. 또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있는 난초류 6종도 함께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한마디로 우리 자생식물 보호망에 큰 구멍이 뚤려있는 것이다.

식물류와 달리 우리의 고유 동물과 곤충류는 주로 외래종의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생태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생존력이 강력한 이들 외래종은 닥치는 대로 우리 토종들을 먹어치워 자연스런 먹이사슬의 구도를 깨뜨린다.

‘생태계의 무법자’ 황소개구리(양서류)와 청거북(파충류)을 비롯해 블루길, 이스라엘잉어(일명 향어), 떡붕어, 무지개송어, 찬넬메기, 배스 등의 어류들은 우리의 토종들을 닥치는데로 먹어치우는 환경 파괴자들이다. 또 최근에는 원산지나 도입 경로, 그리고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뉴트아라는 희귀종도 등장했다. 이밖에 울창한 산림에 치명타를 가한 솔잎혹파리와 흰불나방같은 곤충의 폐해는 알려진지 이미 오래다. 이들 외래종은 수입 곡물이나 목재 등을 통해 퍼져나가 지금은 토종을 완전 제압하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농업과학기술원 안완식 책임연구원은 “21세기에는 생물체가 지적재산의 원천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그때 토종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정부 차원에서 우리의 고유 종자를 찾아내 그것을 지키고 연구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이제 토종 동식물 같은 생명자원은 환경·생태적 의미뿐 아니라 엄청난 부가가치를 지닌 지적재산권의 개념으로 인식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자원의 종속 국가가 될 위험성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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