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의 허와실]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경영한다

10/26(화) 20:39

국제화(globalization)가 세계경제의 키워드가 됐다. 경제적 측면에서 국제화는 국제적인 자본 유동성의 획기적인 증가로 요약된다. 자본이 물리적인 국경선에 구애받지 않고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규모도 커졌다는 의미다.

자본의 국제화를 선도하는 주체는 다국적 기업이다. 다국적 기업은 MNCs(multinational corporations), 또는 TNCs(transnational corporations·초국적 기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최근들어 다국적 기업보다는 초국적 기업이란 명칭으로 보다 널리 통용되는 추세다. 어쨌든 다국적 기업은 모기업의 국적에 관계없이 세계 각국, 각지에 자회사나 생산·물류기지를 두고 전세계적으로 영업을 하는 기업집단을 가리킨다.

2조달러에 이르는 자본 소유

그러면 다국적 기업의 파워는 어느 정도일까. 세계 100대 다국적 기업은 총 2조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모기업의 국적지 바깥에서 소유하고 있다. 이 금액은 전세계 직접투자액의 25%와 맞먹는다. 다시 말해서 세계 100대 다국적 기업이 세계 각국간 상호 직접투자의 4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다국적 기업의 매출액은 이미 웬만한 국가는 난쟁이로 비치게 할 만큼 거대해졌다. 세계적 소매업 체인인 월마트의 98년 매출액은 1,193억 달러로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1,191억 달러)을 능가한다. 폴크스바겐의 연매출은 653억 달러로 뉴질랜드의 GDP(650억 달러)를, IBM은 785억 달러로 이집트(755억 달러)를 넘어섰다. 미쓰비시의 98년 매출은 1,289억 달러로 남아공의 GDP(1,291억 달러)보다 많고, 소니(550억 달러)는 체코(549억 달러)를, 제너럴 일렉트릭(908억 달러)은 이스라엘(920억 달러)을 제쳤다.

다국적 기업이 한 해에 국경을 가로질러 이동시키는 자본규모는 얼마나 될까. 한 공식통계에 따르면 약 4,0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유엔은 이 금액이 과소평가됐다고 말하고 있다. 유엔은 다국적 기업이 현지조달하는 자금과 파트너 기업의 주가를 합산하면 한 해에 1조4,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전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임금과 유치국가의 세제우대를 비롯한 각종 혜택을 쫓아서, 또는 원료산지에 대한 접근성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돼 왔다. 최근에는 이같은 전통적인 유인보다는 관세장벽 회피와 시장에의 접근성이 중시되고 있다. 생산지와 시장을 통합해 물류비용을 최소화하고, 수입국에 생산기지를 설치함으로써 관세장벽을 간단히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좋은’ 다국적 기업 유치

다국적 기업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커지면서 각국도 이들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국제화가 단순히 자유경제를 표방하는 다국적 기업의 구호가 아니라 각국의 정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IMF 이후 한국정부가 외국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내 투자여건을 다국적 기업의 입맛에 맞도록 정비함으로써 구애하고 있는 셈이다. 다국적 기업은 돈벌어서 좋고, 유치국은 고용을 늘리고 선진기업의 경영기법과 기술 등 노하우를 얻을 수 있어 ‘누이좋고, 매부좋다’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을 이야기 할 때 흔히 나오는 이야기는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것이다. 모기업의 국익이 아니라 이익을 쫓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라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세계각지 자회사의 영업활동과 자회사간의 수출입을 조정하는 것은 모기업이고, 모기업은 국가정책을 일차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국익 종속론’도 적지 않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반면 로버트 라이시 전 미국 노동부 장관의 주장은 다르다. 예를 들어 일본기업 미국 현지법인은 일본기업이 아니라 미국기업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미국인을 고용하고, 미국에 세금을 내는 일본기업은 해외에서 영업하는 미국적 기업보다 미국의 이익에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그는 해외의 미국적 기업보다는 미국내 외국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논리에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막강한 파워를 가진 다국적 기업은 유치국의 정책적 자율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치경제학 계간지인 ‘월드 폴리틱스’는 97년 겨울호에서 ‘국가의 소멸?(THE ECLIPSE OF THE STATE?)’이라는 흥미있는 제목의 특집을 냈다. 부제는 ‘국제화 시대 국가에 대한 성찰’이었다. 이 특집은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자본의 국제화 시대에 전통적인 의미의 국가 자율성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가의 전권사항이었던 세제, 관세, 노동, 자본정책 등이 더이상 국내정치의 표현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역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분명한 추세다. 문제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국가적 대응의 틀이 정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외국자본이 대거 유입될 경우에 발생할 국가의 정체성 혼돈이다. 더구나 다국적 기업은 막강한 자금력과 협상수단, 로비력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은가.

국제화를 마법의 주문처럼 외치는 정부는 자칫 자신을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 이른바 ‘21세기 국제화의 함정’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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