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의 허와실] 해도해도 너무한 '자기들 멋대로'

10/26(화) 20:42

10월9일, 서울 동작대교 밑 수중에서 한 외국계 은행 지점장의 시신이 발견됐다. 씨티은행 명동지점장 안재원(36)씨였다. 안씨는 사흘전 출근하면서 “은행을 위해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경찰은 안씨가 올해 3월 지점장을 맡은 뒤 과중한 업무부담에 시달리다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건은 노동문제에 관한 한 외국계 기업도 예외일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방적으로 한국경제 부흥의 파트너로 보기 보다는 외국기업 역시 정책적 조정과 법적 감시의 대상이 돼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외국기업의 한국내 경영관행을 색안경을 끼고 도매금으로 평가할 수 없다. 모기업의 국적과 기업문화, 한국내 경영규모와 역사 등에 따라 큰 편차를 갖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범적인 기업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국내기업 탈·불법 답습하는 외국회사 늘어

그러나 기존 국내기업의 탈·불법을 따르는 외국기업이 늘고 있다는 것은 노동계의 일반적인 이야기다. ‘한국기업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는 식이다. 외자유치에 급급한 정부의 저자세 정책을 이용해 노골적인 수준으로 탈·불법을 행하는 외국기업도 적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대규모 사업장일 수록 한국기업의 빗나간 노동관행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씨티은행 엄진수(32) 노조위원장은 이번 안 지점장 자살사건에 대해 “예고된 죽음”이라고 말했다. 사측이 과중한 노동강도와 상대적 저임금으로 근로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 엄 위원장의 단언이다. 엄 위원장의 이야기. “지난해부터 소비자 금융을 대출우선 정책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근로시간 등 직원들의 노동강도가 크게 높아졌다. 반면 최근 2년간 신규채용이 거의 없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며 호소할 정도다. 여기에다 임금도 낮아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가 37%에 못미칠 정도로 크게 떨어졌다. 다른 외국계 은행으로 직급을 높여 전직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이직률도 12%에 달한다.”

67년부터 한국에서 영업을 해온 씨티은행의 현재 대졸초임 연봉은 1,970만원. 후발은행인 하나은행의 대졸초임 연봉은 2,800만원이다. 씨티은행 노조가 9월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직원만족도 조사 보고서’를 보자.

업무수행을 위한 부서인원의 충분성에 대해 57.1%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46.7%가 개인업무량이 과다하다고 대답했으며, 업무 때문에 사생활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는 응답도 35.2%에 달했다. 하급직원에 대한 상사의 인격적 모독행위에 대해서는 42.4%가, 폭력적 행위에 대해서는 11.1%가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직을 원하는 사람중 50.1%가 그 이유로 ‘받는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를 꼽았고, 33%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불합리한 인사제도, 인격모독 행위도

불합리한 인사형태도 씨티은행 직원들의 불만중 하나다. 총직원 606명중 차장급 이상이 378명, 차장급 아래가 228명으로 역피라미드형이다. 아래층이 엷어 업무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과장급까지 지급되는 연장근로 수당이 차장부터는 없어지면서 차장진급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물론 회사측에서 강제로 승진명령을 낸다는 것이 노조측의 주장이다.

인권침해성 규정을 강요하는 기업도 있다. 프랑스계의 A은행은 직원들에게 사적 계좌의 변동내역을 회사측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계 B은행의 경우는 코미디에 가깝다. 노조측이 ‘매년 나오던 추석선물’을 요구하자 한 은행간부는 며칠 뒤 ‘껌 12통’을 사와 던져주었다고 한다. 몇년전 미국계 C은행 간부는 노조간부들을 “짐승(animal)”이라며 욕한 적도 있다.

한국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례를 짚어보자. 대표적인 것이 근로자파견제 악용이다. 국감자료에 따르면 씨티은행은 파견업체로부터 비서직으로 직원을 공급받아 일반 직원과 다름없는 경리, 여신업무 등을 맡겼다. 정규직 근로자들을 배제하고, 급여지출을 줄이기 위해 파견근로자들을 변칙적으로 활용한 탈법 사례다.

씨티은행의 엄진수 노조위원장은 이같은 탈·불법이 행해지는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5년 시한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는 모기업 간부들이 재직기간의 당기순익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또다른 이유는 ‘한국정부의 사대적인 자세’에 따른 것이다. 정부규제가 외국기업만 만나면 약해진다는 것이다. 기업구조조정 협상 등에서 외국계 은행들이 지분보다 훨씬 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엄 위원장의 주장이다.

“그래도 외국기업서 일하겠다” 아이러니

이같은 사례들이 시사하는 것은 자명하다. ‘선진 경영기법을 빌미로 한국인 근로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기업 근로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는 “다시 한국기업에서는 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조건이 한국기업보다는 낫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같은 주류속에 파묻혀 있는 ‘노동권 사각지역’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한 노동계 인사는 “우리나라 형편이 아쉬워 외국기업에 무조건 손벌릴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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