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부 풍속도] 가정이 뒤집어지고 있다

10/26(화) 21:00

‘부부’의 고정 관념이 바뀌고 있다. 이제 ‘일하는 남편’, ‘애보는 주부’라는 기존의 단순 도식은 먼지 낀 서랍속의 밀랍 인형과 같다. 부부 관계는 이제 결혼이라는 ‘통과의례’속에 얽매인 틀이 아니다. 더욱 안정된 자기 개발의 장이자,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의도된 결합이다. 추구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주저없이 갈라서 각자 새 삶을 찾아나선다. 그것이 20대이건 60대이건 개의치 않는다. ‘우리’라는 울타리 속의 내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된 ‘우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광수(34), 박연숙(30)씨 부부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부부’다. 이들은 현재 나란히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각각 서울대와 이화여대 철학과에서 시간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3년전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한 스터디 그룹에서 만나 결혼까지 골인했다. 하지만 김씨의 집에 가보면 조금 색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부부는 각방을 쓴다. 남편 김씨는 큰 안방, 아내는 나머지 작은방 2개를 쓴다. 각자 강의 준비와 논문 연구로 라이프 사이클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작업과 수면 시간만은 방해하지 말자는 의도에서 착안한 이들만의 생활 방식이다. 물론 두사람은 ‘철학’이라는 공통의 지향점이 있어 강연회는 물론이고 연극, 전시회에 함께 다니며 취미 생활도 함께 한다. 서로 철학과 인생을 논하고 도와주며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다.

일에 대한 성취욕으로 ‘아이’는 뒷전

하지만 단 한가지 고민이 있다. 바로 아이 문제다. 남편 김씨는 ‘개인적인 일과 성취’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래서 3형제중 장남이지만 ‘나의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 물론 아내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아직 2세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이들은 오히려 ‘혹시 나이들어 아이를 갖고 싶어지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결혼을 통해 영원한 인생과 사회의 동반자를 얻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대학 동기생이었다가 결혼한 박정남(31·가명), 원혜숙(31·가명)씨 커플은 가정과 직장에서 하루 24시간 함께 동거동락한다. 두사람은 전공을 살려 2개의 컴퓨터 회사를 설립, 남편 박씨는 사장으로, 부인 원씨는 부사장으로 회사일을 분담하고 있다. 회사 근처 원룸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역시 회사일. 너무 바빠 아직 아이도 갖지 못했지만 함께 인터넷 벤처사를 키우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만족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독신자, 무자녀, 이혼자들에게 사회적 편견을 주지 않는 그런 사회적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높아가는 가정내 여성지위

이처럼 최근의 부부 풍속도는 불과 7~8년전에 비해서도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다. 남자는 이제 결혼과 가정이 단순히 ‘의무와 책임’을 수반하는 울타리이길 원치 않는다. 여자 역시 가정이 단지 안주하고 머무는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함께 즐기고 서로 도와주며 더 높게 성장할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곳으로 만들길 원한다.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족, 듀크(DEWK·Dual Employed With Kid)족은 이제 소문으로만 떠도는 신조어가 아니다. 바로 우리 옆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부 유형들이다. 최근의 부부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가정내에서 여성의 목소리와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여론 조사결과 ‘결혼 후에 여자도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를 하겠는가’하는 질문에 응답자의 10.7%가 ‘아니다’고 답한 반면 맞벌이를 하겠다고 한 응답자는 무려 ‘52.8%’에 달했다. 특히 맞벌이의 이유에 대해 1위가 ‘자아실현(38.1%)’이었고 ‘경제적인 풍요’는 25.0%로 2위로 밀려났다. 여성도 결혼후에 남자들과 동등하게 자신을 개발하고, 자신만의 삶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취미도 부부 생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박세현(34) 정영현(26)씨 커플이 그런 예다. 삼성전자 디자인실에서 근무하는 박씨는 지난해 7월 PC통신 대화방에서 당시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는 아내 정씨와 처음 사이버공간에서 만났다. 대화 내용은 주로 박씨가 즐기고 있는 인라인스케이트(일명 롤러브레이드). 그런데 어느날 정씨가 사내 통신망을 통해 전화번호를 알아내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그후 이들은 초겨울까진 매주 인라인스케이트를, 겨울에는 함께 스키를 즐겼다. 그러면서 가까와져 올 4월 화촉을 밝혔다. 결혼식 당일 이들은 이튿날 신혼여행을 앞두고 스케이트를 탔고 신혼 여행지인 빈탄섬에서는 아내 정씨가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져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아직 2세가 없다. 지금도 명절을 제외하면 박씨 부부는 함께 스케이트를 매고 한강으로 달려간다.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부부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이런 추세에 맞춰 최근 스포츠를 비롯해 영화 등산 여행 전시회 등의 레저와 문화 이벤트가 대부분 부부를 주 타켓으로 삼고 있다. 대가족제도에서 소가족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가정까지 파고든 극단적 이기주의

그러나 이런 신풍속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 같으면 이혼은 사회적으로 백안시되는 경향이 있어 가급적 문제를 묻어두고 살았다. 하지만 이미 수년전부터 이런 사회적 인식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별 꺼리낌없이 갈라서곤 한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가정에까지 침투하고 이쓴 것이다. 최근 양부모 있는 ‘고아 아닌 고아’가 늘어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추세와 관련이 깊다. 예전 같으면 이혼시 서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법정 소송도 벌였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아이를 안 맡겠다고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독신이나 재혼에 부담이 되는 자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유롭게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것이다.

서울시립아동상담소 인준경(45) 상담원은 “예전에는 정말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극빈곤층 아이들만 보육원에 왔다. 그러나 최근 2~3년전부터는 아빠 엄마가 모두 충분한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단지 ‘이혼할 때 부담되니 아이를 맡아줄 수 없느냐’는 의뢰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인씨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예전 대가족 사회 구조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강해 부모가 희생하더라도 자녀를 돌보겠다는 생각이 뿌리 깊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이런 불행한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부부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개인주의화는 이제 거를수 없는 대세다. 하지만 여기에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책임을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큰 병폐를 낳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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