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금창리의 ‘핵의혹 지하시설’ 과 관련된 우려가 구체적 현실로 다가오는듯 했던 지난주 미국은 누가봐도 분명하게 ‘치고 빠지기’ 전략을 구사했다. 북한의 핵의혹을 실제이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미국의 행동은 찰스 카트먼 미 한반도 평화담당특사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됐다.

카트먼 특사는 금창리 시설에 대해 북한과의 협상을 마친 직후인 지난 11월19일 방한, “핵관련 시설이 건설되고 있다는 의혹이 있는 곳은 영변에서 북서쪽으로 40㎞ 떨어진 금창리” 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뒤 “이 시설이 핵개발과 관련돼 있다는 ‘Compelling(강력한 또는 믿을 수 밖에 없는)’ 증거가 있다” 고 말했다. 카트먼 특사가 매우 이례적으로 우리측 외교부 기자실 방문을 자청, 기자간담회를 통해 밝힌 이 ‘핵의혹 시설’ 때문에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해졌다.

특히 97년도 결산및 99년도 예산 심사를 벌이고 있던 국회에서는 통일외교통상위 국방위 정보위를 중심으로 북한의 핵의혹시설이 주는 위험이 어느정도인가를 따지며 정부를 추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트먼특사의 말 한마디가 정확히 ‘의도했던 대로’ 일파만파를 일으킨 것이다.

미의회의식한 ‘과장전략’ 분석, 정부 불만

이같은 카트먼 특사의 ‘도발적’ 발언에 대해 우리측 정부 당국자들의 반응은 ‘불만’ 에 가까운 것이었다. 청와대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카트먼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비공식 브리핑을 통해 “카트먼 특사는 미국이 확보했다는 증거의 수준을 ‘Compelling’ 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것” 이라고 말했다. 임 수석은 이어 “이같은 증거는 확정적임을 의미하는 ‘Convincing’ 또는 ‘Conclusive’ 에는 미치지 못하며 다만 의혹의 강도를 강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고 덧붙였다.

정부의 또 다른 당국자는 카트먼 특사의 발언을 최근들어 부쩍 대북 강경기조를 보이고 있는 미 의회를 의식한 미국 ‘국내용’ 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또 국회 정보위에서 이종찬 안기부장은 보고를 통해 “한미가 공동으로 확보한 정보에는 ‘과학적 정보’ 도 있고 ‘인적 정보’ 도 있으며 양국은 이같은 정보를 놓고 최소한 4차례이상 긴밀한 협의를 가졌다” 고 밝혔다.

이 말은 북한 지하시설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 단시일내에 증폭된 것은 아니며 한미 양국은 상황의 추이를 계속 추적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카트먼 특사가 기습적으로 북한의 핵위협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금강산 관광 등 ‘햇볕정책’ 으로 상징되는 대북 포용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정부로서는 미측의 이같은 돌출 발언은 이래저래 부담이 됐을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다.

카트먼 특사 발언의 파장은 정확히 이틀동안 계속됐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으로 이루어진 21일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측은 ‘빠지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카트먼 특사가 ‘결자해지’ 의 자세로 주한 미 공보원을 통해 자신의 발언을 해명했다.

카트먼 특사는 발표문에서 “우리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한 강력한 정보가 있지만 이 지하시설이 핵관련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핵시설인지에 대한 확증은 없다” 고 물러섰다. 카트먼특사는 이어 “이 시설의 핵관련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북한에 대해 전면적인 현장접근을 요구한다” 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북 중유제공 비용과 관련된 ‘북한 카드’ 시각

이같은 카트먼 특사의 해명성 발표문은 21일 오전 11시 한미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불과 2시간여전에 나왔다. 이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왕에 한미간에 노출됐던 북한 핵의혹시설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일단 ‘덮어두는’ 쪽으로 사전 정지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한미 양국이 정상회담 석상에서 용어의 해석 여하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같은 정리작업은 일단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한미 양국간에는 언제든지 이같은 인식의 차이 및 대북 정책에 있어서의 강온의 차이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수 밖에 없다. 영변의 핵의혹 시설을 둘러싼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93, 94년에도 한미 양국은 지금과 거의 흡사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 채로 북한 핵문제 해결에 보조를 맞춰 왔었다.

북한의 핵위협을 바라보는 한미간 시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측이 하필이면 금강산 관광선이 북한을 오가는 이 시점에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 이유가 무엇때문인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이에대해 “아마도 미국이 우리측에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 이라고 말했다. 즉 이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미측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쉬운 것이 있을 때 ‘북한카드’ 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미측이 제네바 합의에 의해 북측에 제공하게 돼 있는 중유 비용일 수도 있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분석이다. 미측은 대북 중유제공의 비용을 책임지고 조달해야 하는 입장이나 최근 대북 강경기조를 보이고 있는 의회때문에 예산책정이 점점 더 어려워 지고 있는 실정이다.

미 국익 위한 ‘남·북 긴장’ , 냉혹한 국제 현실

이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틀로 남북관계및 대미관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즉 초강대국인 미국은 우리의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강경하거나 지나치게 부드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미국은 언제든 남북관계에 개입해 자신들의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선에서 상황이 전개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우리측에 확실히 양보할 수는 없을 것이란 얘기다. 한미관계가 아무리 혈맹관계라고는 하지만 이같은 미국의 입장 또한 냉혹한 국제현실 속에서는 수긍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미국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미측의 기습적인 ‘북한카드’ 가 때로 우리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벗어나기 위한 전국민적 노력을 펼치고 있는 이때에 안보위협을 지나치게 과장하면 외국의 투자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는 점을 우려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북한의 핵개발 위협을 절대로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한 경각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면서 “그러나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불명확한 판단은 남북관계의 기본적 방향을 일순간에 왜곡시킬 수 있다” 고 지적했다.

고태성·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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