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와, 튀면 다쳐"

10/26(화) 20:47

23일 낮 서울근교의 N 골프장. 한나라당 중진의원 12명이 한꺼번에 3팀을 이뤄 라운딩을 하고 있다. 신상우국회부의장이 ‘당 화합을 위해’ 주선한 골프회동이다. 참석자의 면면은 신부의장 외에 이회창총재, 김영구 이세기 서청원 박희태 김정수 김동욱 유흥수 이상득 심정구 신영균의원 등이었다. 선약과 지역구 행사 등을 이유로 김윤환 이기택 이한동 강삼재 의원 등이 참석하지 못했으나 ‘갖출 건 갖춘’ 중진모임이었다.

참석멤버는 신부의장이 직접 선정했다. 3선이상의 다선(신영균의원은 당고문 자격의 특별 케이스)에 주류와 비주류를 포함, 각 계파를 고루 대표할 수 있는 중진의원이 대상이었다. 모임은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고, 운동이 끝난 다음 이어진 뒷풀이 자리도 꽤 거나했다.

이날 골프모임은 지난 10일의 이총재 초청 비주류 중진 골프회동에 이은 또 하나의 ‘이회창 이벤트’였다. 서청원 강재섭 이해구 정창화 김영진의원 등이 참석한 10일 모임에선 폭탄주가 10잔 이상 돌았고, ‘이회창을 위하여’가 스스럼 없이 터져 나왔었다. 두 모임은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독주체제’가 완성됐음을 웅변해 준다는 게 이총재측의 자평이다. 과연 그럴까?

당지도부 독선에 곳곳서 불만의 목소리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 입구 로비. 한나라당 박종웅의원이 특유의 데시벨 높은 음성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일방적으로 의원총회를 취소하는거냐. 언론탄압을 이유로 박지원문화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낸 당 지도부가 당내 언로를 이렇게 막아서야 되느냐. 이런 식이라면 이회창총재에 대한 해임건의안이라도 내야 할 판이다.” 박지원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직후 국회 구내방송을 통해 의원총회가 최소됐음을 알게 된 박의원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의원은 이수인·이미경의원 제명 안건이 기습처리된 21일의 의원총회에서 절차상의 하자 등을 지적하려는 자신의 발언이 제지당하는 바람에 단단히 열이 받아 있는 상태였다.

박의원 뿐 아니었다.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의원총회 과정에서 드러난 이총재와 이부영총무, 하순봉총장의 독선적 당운영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우선, 21일의 의총진행 방식 자체가 대단히 비민주적이었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제명안을 의결하겠다는 사전 고지도 없었던데다, 절차상 하자를 지적하는 의원들의 발언권까지 박탈하면서 당지도부가 표결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얼떨결에 이루어진 기립표결 직후 이어진 토의시간에도 이총무 등 당 지도부는 도·감청 문제에 관한 장황한 보고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채 박종웅의원 등의 의사진행 발언권 신청을 묵살했다. “박지원문화부장관의 해임건의안 표결을 앞두고 당 분위기가 흐트러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자꾸 그러면 공천때 재미없어”

의총이 끝난 뒤 반대의사를 개진한 권오을의원 등에게 보인 당 지도부의 고압적 자세도 적잖은 문제가 됐다. 이총재는 “나도 의총이 있으면 당헌당규를 꼼꼼히 훑어보고 오는 데 권의원은 뭐하는 거냐. 의총절차에 무슨 하자가 있다는 말이냐”고 권의원을 직접 힐난했고, 이총무는 “언론에 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거냐. 그렇게 해서 선거 어떻게 치르려고 하느냐”고 닦아 세웠다. 이총무의 말에는 ‘그런 식으로 나오면 총선 공천 때 재미없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것으로 모자랐던지 하순봉총장까지 을러대기 대열에 가세, 권의원을 ‘집단 린치’하는 일사분란함을 과시했다.

박지원문화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 이후로 예정됐던 22일의 의원총회를 일방적으로 취소한 당 지도부의 독선적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다. 22일 의총은 당초 박장관 해임건의안 표결결과와 상관없이 갖기로 예정됐던 것인데, 표결을 마친 의원들은 국회 구내방송을 통해 의총이 취소됐다는 사실을 통보받게 됐다.

의총 취소에 대해 이총무는 “대다수 의원들이 지역구 사정이 바쁘다고 해 취소하게 됐다. 21일 의총에서 절차문제를 거론했던 이재오의원도 의총이 끝나자마자 지역구 행사 참석을 위해 본회의장을 떠났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총무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이총무는 ‘대다수 의원들이 원해서’라고 했지만, 박장관 해임건의안 부결은 단지 ‘지역구 사정 때문에’라는 이유로 유야무야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자유언론 수호’와 ‘정권의 언론탄압 저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력을 총집중해 추진했던 박장관 해임건의안 문제에 대해 마무리 의총 한번 하지 않고 손을 턴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더군다나 이총무는 21일 의총 때 의원들의 발언신청을 가로막으면서 “내일 의총이 있으니 그때 가서 할 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둘러댔던 터였다. 전후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시끄러운 일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 의총취소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는 어차피 어려웠다.

비주류 “4월, 그날이 지나면”

한나라당 지도부의 독단적 당 운영 행태는 뒤집어 보면 그만큼 이회창 체제가 견고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정도로 당 장악에 자신이 붙었다는 얘기다. 아직도 외곽을 돌고 있는 이한동전부총재를 제외한다면 한나라당내에 이총재에 정면대적할 비주류는 이미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기회있을 때마다 이총재와 대각을 세워왔던 비주류 의원들은 이제 “내년 총선까지는 현 체제로 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창(反昌)’ 깃발을 내려버렸다.

그렇다고 이들이 마음속으로까지 이회창체제에 복속하고 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들의 눈길은 일찌감치 ‘4월총선 이후’에 가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엎드리고 있지만 선거만 끝나면 본격적인 ‘엎어치기’에 나서겠다는 게 이들의 본심이다. 특히 지금처럼 이총재가 자신의 편의에 따라 법대로와 멋대로를 자의적으로 오가는 비민주적 행태를 계속한다면 반전의 그날은 더욱 빨라지리라고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이회창체제의 견고성이 건강성과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이들의 기대는 한낱 꿈이 아닐지 모른다.

홍희곤·정치부기자 hghong@hk.co.kr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