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뜬금없는 색깔논쟁?

10/26(화) 20:48

국민회의가 최근 마련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개혁입법의 처리를 앞둔 정기국회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정부가 국민들의 북한 텔레비전 위성방송 시청을 조건부로 허용한데 이어 국민회의가 내놓은 국보법 개정안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모두 국보법의 개정에는 어느정도 공감하고 있지만 강도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국민회의는 김대중대통령의 확고한 국보법 개정의지에 따라 ‘전면 개선’쪽으로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보수정당을 표방하는 자민련과 야당인 한나라당은 “부분손질은 몰라도 큰 틀의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못박고 있다. 이에따라 총선을 코앞에 두고 여야 3당이 때아닌 ‘이념전'(理念戰)’으로 한판 힘겨루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민회의 개정안에 보수층 반발

국민회의는 사실 국보법 문제를 햇볕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지만 자민련은 “햇볕정책은 햇볕정책이고 보안법은 보안법”이라고 반발한다. 자민련이 워낙 완강해 국민회의가 박지원장관 해임건 처럼 ‘싱거운 승리’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자칫 공동여당의 정책공조의 균열점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국민회의가 내놓은 개혁안을 뜯어보면 사실 보수층이 반발할 내용이 곳곳에 눈에 띤다.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은 찬양고무죄를 폐지한 것. 이 조항은 지난해 12월 유엔인권위원회로부터 국제인권규약 위반이라는 이유로 개정권고를 받은 바 있다. 불고지죄와 함께 독소조항중의 하나로 꼽혀 온 조항이다. 국민회의는 당초 자민련의 반발을 고려해 ‘부분 수정’입장이었지만 막상 성안단계에서 완전폐지쪽으로 기울었다. 국민회의 개정안은 7조의 찬양고무죄 조항중 이적단체 구성죄만 남겨놓고 모두 삭제했다.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는 이적단체를 직접 만들거나 가입하는 행위는 처벌하고 개인차원의 찬양 고무 행위는 국보법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령 광화문에서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큰 소리로 외쳐도 이적단체 구성원이 아니라면 국보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다만 찬양고무죄를 경범죄 처벌등 형법쪽으로 돌려 규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소란을 일으킨’ 혐의 정도로 처벌한다면 사실상 폐지하겠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민회의는 7조5항의 이적표현물 제작·배포·판매 조항도 삭제했다. 북한에 우호적인 서적을 펴내거나 친북성향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행위도 허용된다는 의미. 과거 북한 관련 유인물이나 좌익철학서적만 소지해도 국보법으로 처벌됐던 것과 비교하면 ‘세월이 변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국민회의측에선 “기본권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진일보적인 조치”라고 설명했다.

찬양고무죄 폐지등 혁신적 개혁안

반국가단체의 개념도 달라졌다. 현행 국보법에선 반국가단체는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을 의미했다. 그런데 개정안에선 ‘정부참칭’ 이란 표현이 빠졌다. 현재 정부를 제멋대로 일컫는 집단이나 국가는 북한밖에 없다. 개정안대로라면 북한이 남한을 변란(變亂) 즉 무력도발만 하지 않는다고 공개선언하면 북한은 더이상 반국가단체가 아니다. 금강산개발등 최근 달라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보안법 개정론자들이 비판의 단골메뉴로 거론했던 남북교류협력법과의 법적 통일성 문제도 일거에 해결한 셈이다.

또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과 관련,현행법아래선 최대 50일간의 구속이 가능하나 이 역시 일반 형사범과 같은 최대 30일로 줄였다. 인권보호라는 도덕적 가치가 대공수사의 특수성을 압도한 셈이다.

사실 국민회의의 보안법 드라이브는 김대통령에게서 출발한다. 국보법 논쟁은 김대통령 취임직후부터 있어왔고 공동여당간에도 누차 거론됐지만 자민련의 반대로 그간 수면아래 잠복해 있었다. 국민회의도 공동여당의 분열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 그러나 지난 7월 자유의 메달을 수상하러 필라델피아로 갔던 김대통령이 국보법 개정의지를 피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김대통령은 지난 22일에도 국민회의와 자민련 지도부, 양당 정치개혁특위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 하면서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쐐기를 박았다. 김대통령은 이날 “공산주의는 봉쇄가 아니라 개방에 의해 몰락했다”면서 국보법의 개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대통령이 개정의 필요성을 언급한 반국가단체 개념을 정의한 국보법 2조와 찬양고무죄 조항, 불고지죄 조항등은 고스란히 국민회의의 개정안에 반영됐다. 김대통령이 자민련측에 정색하고 국보법 문제를 거론하긴 처음이다. 그만큼 자민련에겐 압박이 된다. 박태준총재등 자민련 지도부는 이에대해 별다른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보법 무너지면 타격”자민련 반대

하지만 자민련의 속내는 심각하다. 최근 발행된 자민련 당보를 보면 국민회의와의 간극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가 극명하게 들어난다.

“국가보안법을 없애거나 크게 고쳐야 한다는 논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보안법은 단지 국가의 안보를 해치는 행위만을 처벌하기 때문에 보안법이 있어도 남북교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고지죄와 고무찬양죄를 아예 삭제하자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간첩을 보고도 신고하지 말고 북한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거동수상자가 있어도 수사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안법 때문에 생활상의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자민련 법사위 소속의원들은 최근 법무부와 대검찰청, 대법원등의 국정감사에서 국가보안법 문제를 집중 거론하며 ‘내편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자민련 내부에서는 “국보법이 무너지면 보수정당인 자민련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여권의 보안법 개정에 심드렁하다. “자민련과 먼저 협상해 오라”고 협상테이블에 앉지도 않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문제는 철저히 상호주의원칙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북한형법도 함께 개정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법무부등도 대통령의 뜻에 따라 보안법 개정작업에 손을 댔지만 국민회의처럼 적극적이지는 않고 대공수사의 주무인 국정원도 국민회의 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대공수사에선 간첩잡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어진다. 국민회의에서 독자적인 국보법 개정안을 추진해도 국회통과까지는 첩첩산중인 셈이다.

이같은 상황탓에 정치권 일각에선 국민회의가 여-여, 여-야 협상을 대비해 일부러 파격적인 카드를 마련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의 반대를 뻔히 아는 국민회의로선 일단 출력을 최대한 높여 협상 테이블에 앉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보법 개정은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민련 주장처럼 “소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일”이 될 지, 국민회의의 주장처럼 “시대의 악법을 바로잡는 일”이 될지는 좀더 두고봐야 알 것 같다.

이태희·정치부기자 taehee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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