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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시시한 노벨상보다 동포 돕는게 중요합니다"

“오늘같이 비가 오면 또 농사가 안되는데…”

노벨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교수를 만나러 갔는데, 막상 앞에 앉은 사람은

천상 농부였다. 옥수수박사이자 세계적 육종학자인 김순권(54·경북대학교 석좌교수)박사. 방금 전 포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그는 첫 얘기부터가 날씨걱정에 농사타령이었다.

“말이 교수지, 사실은 농부지요. 그동안 워낙 바삐 다니느라 자세히 보질 못했는데 조금전 오다 보니 비에 쓰러진 벼가 생각보다 많더군요. 심각합디다. 북한에서도 이번 비때문에 쓰러진 벼를 일으키느라 다들 동원이 되고 난리던데, 어째 우리쪽은 조용하네요. 올핸 특히 피해가 클텐데, 또 이렇게 비가 오니 걱정입니다.”

뒤이어지는 ‘수퍼옥수수학 개론’. 수퍼옥수수는 무슨 특별한 종자 이름이 아니라 병과 벌레에 더 잘 견디고 요즘같이 비가 와도 잘 자라는 환경친화적인 옥수수를 말한다든가, 원래 옥수수는 벼, 콩과는 또 달라서 매번 일일이 손으로 다 교배를 시켜야 되기 때문에 연구가 더 어렵고 품이 많이 든다든가,

또 꼭 콩이랑 함께 심어야 옥수수도 제대로 자란다는 사실 등등을 그때 다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분하게’ 설명을 듣다가 인내심없이 꺼내고 만 것이 노벨상 얘기. 한때 김박사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후원회까지 만들어졌던 데다 해마다 이맘 때면 온 국민의 숙원사업처럼 떠오르는 것이 노벨상 수상인터라 또한번 국민들의 눈길이 쏠리고 있는 이때 그의 심경이 궁금했다.

“노벨상이요? 전 관심 없습니다. 받으려면 아프리카에서 올 때 받아 왔었어야 되는데, 이젠 북한동포 돕기도 바쁘고, 초월한지 오래됐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노벨상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정상적으로 자기가 맡은 일 열심히 하다보면 자연히 따라오는게 상이지, 그것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세상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시시한 노벨상보다 요즘같이 고통받는 우리 동포들 돕는 일이 제겐 더 중요하고 보람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덩달아 노벨상이 시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란 이름으로 아프리카 수개국의 국민들로부터 강력 추천을 받고 있는 그가, 또 최근엔 북한 동포의 기근을 돕겠다고 나서 온갖 시간과 땀을 바쳐가며 일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데야

누가 뭐라고 하랴.

북한엔 옥수수와 더불어 삶의 희망까지 심어

옥수수박사의 명성은 휴전선 너머에서 더 절대적인 듯 하다. 북한 주민들의 기아사태가 극에 달하던 작년 1월14일, 남북분단 이후 북한측과는 최초의 공식협약을 맺고 방문하기 시작, 최근 9월에 다녀온 것까지 합치면 그간 아홉차례 북한을 출입, 그곳에서 보낸 시간만 모두 석달이 넘는다. 계약기간은 3년, 그중 약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옥수수뿐아니라 삶의 희망까지 탄탄히 심어놓았다. 굶주림에 대한 공포가 조금씩 덜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져간 것은 자신이 개발한 다수확 신품종들. 가자마자 속속 각 마을 협동농장에 심어졌고, 현지의 고급두뇌 20여명의 과학자를 포함해 약 200명의 연구인력이 달라붙어 열심히 작업한 결과 올해 북한내 전체 옥수수 수확량은 작년보다 20~30%나 늘어났다. 이로 인해 한껏 고무된 북한측에선 심지어 몇해 안에 옥수수 수출국으로 일어서겠다는 꿈에 부풀 정도로 여간 반색이 아니다.

“북한에선 김정일이 직접 챙길 만큼 중요한 주력 사업중 하나가 바로 옥수수 증산 문제인데, 처음에 가보니 정말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농업의 안정성이 없다 보니 옥수수만 계속 심느라 땅이 심하게 망가진데다 작년따라 심한 병충해로 피해가 컸었거든요. 여기에 제가 76년에 개발했던 수원19호, 거기선 강냉이19호라 부르지요, 그걸 옮겨다 심고 최근 가져간 비료까지 더해주자 하루가 다르게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요. 워낙 식량난이 심해서 더 열심히 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쪽 담당자들의 열의도 기대 이상이고, 저나 북한쪽이나 다들 놀랄만큼 결과가 좋습니다. 뭣보다 보람있는건 돈 몇푼의 원조가 아니라 그들의 자존심도 살리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것, 그것도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같은 동포로서 그 일을 하고있다는 사실이지요.”

갈때마다 ‘칙사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일. 행여 그가 아프기라도 할까 내내 신경을 써주는가 하면, 외부인에겐 철저히 봉쇄돼 있던 농장이나 시험장 등 비공개 지역도 그에겐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사이가 됐다.

“북한가서 우리만큼 대접 잘 받고 오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저랑 같이 간 일행에게도 원래 외부인들에 절대 보여주지 않는 농장이나 시험장까지 보여주는가 하면 얼마전엔 용문동굴 구경을 시켜주더라구요. 그런데 사실 제가 그런 것에 취미라도 있어야 말이죠. 그냥 차타고 가면서 길가의 옥수수농장 구경하는게 더 좋았습니다. 얘길 들어보니 북한의 인구 절반쯤은 제가 거기 가서 일하는 걸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북한 스스로 일어서도록 돕다보면 남과 북 사이의 오해도 씻고 서로 화해도 이뤄지고, 그러다보면 언제 통일도 되지 않겠어요.”

16년간 아프리카에 머물며 ‘옥수수혁명’일으켜

북한사태만 아니었다면 그는 영원히 아프리카 슈바이처로 눌러앉았을지도 모른다. 4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울산농고, 경북대 농대를 거쳐 70년대 초 수원의 농촌진흥청에 농업연구사로 근무, 그때부터 옥수수 연구를 하면서 71년엔 고려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해 다시 옥수수 연구에 매달린 평생 옥수수 연구원.

79년 유엔 초청으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면서 아프리카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후 약 16년간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그가 일으켜 놓은 ‘혁명’이 다수. 옥수수밭에 끼어들어 살면서 옥수수를 말라죽게하기로 악명높은 잡초 ‘스트라이가’도 맥을 못 추게 한 신품종 ‘오버 수퍼 원’ 등 약 150종의 획기적인 옥수수 품종을 내놓으면서 아프리카 일대에선 일찍이 이름을 떨쳤다. 노벨상 후보 추천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그때. 92년 유엔산하 국제식량농업기구(FAO)와 아프리카 여러국가들로부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물망에 올랐고, 95년 경북대의 요청으로 석좌교수직을 수락, 영구귀국한 후에도 안팎에서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 노벨평화상 후보로 끊임없이 추천되었다.

그처럼 대대적인 응원을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뛰어난 연구업적때문이겠지만 그같은 성과 이면엔 그의 타고난 성실과 고집이 한 몫하고 있다. 고생으로 말하자면 그가 겪은 고생도 ‘수퍼급’. 미국 정부 장학생으로 공부하던 유학시절엔 미국인들의 텃세나 멸시에 적잖이 시달렸다. 보잘것 없는 개도국 출신이라 그를 얕본데다 특히 미국 학생들이 번번이 실패한 육종실험을 그가 고스란히 성공시키는 통에 ‘괘씸죄’에도 걸렸던 모양이다.

목숨걸고 공부, 3년3개월만에 석·박사 끝내

그럴수록 더 ‘목숨 걸고’ 공부했다. 죽든가 공부를 빨리 끝내든가 둘 중 하나라고 각오한 공부벌레였다. 해가 뜨면 옥수수밭에 나가 살다가 해만 지면 책상앞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는게 일과. 한가한 주말에도 그 멋지다는 와이키키 해변 한번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하루 수면시간은 서너시간이 보통. 워낙 오랫동안 책상앞에 앉아있다 보니 나중엔 치질에 걸려 혼이 나기도 했다. 그 ‘사생결단’의 학업 결과 남들이 평균 5년만에 따내는 석·박사 학위도 이례적으로 3년3개월만에 끝내 주위를 탄복시켰고, 귀국후 76년 기적의 품종으로 불린 수원19, 20, 21호를 한꺼번에 터뜨려낸 것도 결국은 그같은 끈기의 힘.

아프리카에 갔을 땐 죽을 고비도 많았다. 갖가지 사고나 병으로 사람이 죽어도 몇날 며칠 그 시체를 길바닥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그 끔찍한 땅에서 그 자신도 말라리아와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가 보았다. 언젠가 차를 몰다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기 직전 마침 현장에 버려져있던 다른 사고차량과 충돌해 아슬아슬하게 멈춰서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다. 또 언젠가는 심한 말라리아에 걸려 동료 미국인에게 부인과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유언까지 남겼던 일도 있다.

귀국 이후엔 이후대로 참 어처구니없는 일도 겪었다. 대학구내 농장에 심어 놓은 연구용 교배종 옥수수 500여종을 도난당한 사건이었다. 96년 말, 잠시 아프리카 리비아대수로 공사관계로 나갔다보니 터진 일. 당시 언론과 경찰까지 나서 범인을 찾았지만, 인근 주민들의 장난 아닌 장난으로 밝혀졌을뿐 그렇게 회수된 15%조차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아무 표시없이 따낸채 서로 섞여버린터라 그 옥수수가 어떤 종자의 교배종인지 ‘족보’를 알 수 없기 때문. 아프리카에서 받은 상금까지 죄 털어넣어 만든 실험이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한국에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건 그 후 잇따른 국민들의 위로, 격려편지 덕분이었다. 그는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세계의 옥수수박사로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중국·몽골·러시아 동포도 도울겁니다”

이제는 옥수수 ‘도둑’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까. 요즘도 그는 전에 못지않은 정열을 옥수수밭에 바치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쯤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국제옥수수재단 일을 보러 서울에 올라가거나 대구의 대학강의, 북한방문때만 아니면 그는 농장에 파묻혀 산다. 현재 그가 돌보는 옥수수밭만 수만평. 대학구내외에도 경북 군위와 칠곡 등지 약 4만평 농장에 옥수수 수만종이 자라고 있고, 그외 강원도 홍천, 철원, 경기도 일산 등 전국 곳곳에 연구소나 시험장이 자리해있다.

아프리카생활중에도 워낙 많은 농장으로 다니느라 자동차 주행거리 총 100만㎞를 주파했던 그는 요즘도 직접 차를 몰고 다닌다. 그의 자동차는 티코. 얼마전엔 누군가 지나가다 이 ‘티코 탄 세계석학’을 보고는 “고명한 박사님께서 그 작은 차가 웬말이냐”고 한말씀 올렸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아랑곳없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내 할 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웬 간섭”이냐며 흘려듣는 외골수 고집통. 그보다 더 마음 써야할 일만 해도 그에겐 평생이 짧다. “북한동포들 다음엔 중국이나 몽골, 러시아 동포들을 찾아가 도울겁니다. 죽기전에 꼭 할겁니다. 만약 내가 못하게 되면 그땐 제자들이 할 수 있게 기반까지 꼭 닦아 놓을겁니다.” 노벨도 못 해봤을 그 ‘특별한’ 일들을 말이다.

정영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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