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편집실에서] 가을이 아픈 농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지난 추석 고향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추석 연휴동안 태풍과 잦은 비로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느라 한시도 쉴틈이 없었습니다. 팔순의 부친은 차례를 지내자 마자 음식을 싸들고 논으로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벼를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일은 고향에 머무는 이틀간 계속 됐습니다. 평소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았던 친구라 온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지만 내색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노령에 그렇게 쉴새없이 일을 하는 노부모가 애처로웠습니다. 친구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자신이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노부모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농사일을 하는 것이 건강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말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큰 고통을 주는 불효였습니다.

그런 친구는 귀경 전날밤 부친으로부터 세가지 다짐을 받았습니다. 논을 다른 사람에게 세놓고, 그 논에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고, 주위 분들이 농번기에 도와달라고 해도 고된 일은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잔소리를 하시지 말라고 한 것은 논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커 다른 사람이 짓는 농사에 대해 간섭을 하다보면 그것이 곧 스트레스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대신 소일삼아 밭이나 가꾸시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친구가 추석에 느낀 감정은 농촌인 고향을 다녀온 대부분의 귀성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일손이 없는 농촌의 부모들에게 자식들은 좋은 일꾼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덕담이나 했을 것이지만 태풍으로 쓰러진 일년농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몸으로 겪은 많은 귀성객들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음은 당연합니다.

친구는 최근 국감에서 밝혀진 농산물 유통실태를 보고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농림부가 6월7일 서울시농수산물공사의 ‘주요 농수산물 유통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배추의 경우 중간 도·소매상의 유통마진율이 88.3%에 달했습니다. 이같은 유통마진율은 재배농민이 배추 한포기에 소매가격의 11.7%만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상추의 유통마진율은 80.7%, 무는 74%, 양파는 63.2%, 감자는 53.7%, 호박은 53.5%, 마늘은 52.4%, 오이는 50.3%, 수박은 47.6%, 참외는 46.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농산물 가격의 절반이상은 중간 도·소매상이 챙기고 생산자와 소비자는 그들의 이익에 들러리를 서고 있는 꼴입니다.

쌀의 중간유통마진율도 해마다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농림부 국감자료를 토대로 한 의원이 ‘쌀의 중간유통마진율’을 조사한 결과, 96년 평균 10.14%에서 97년엔 11.9%로 증가한데 이어 98년에는 14.07%를 기록했습니다. 올해도 8월 현재까지 중간마진율이 16.8%를 기록하는 등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중간상인의 이익은 커지는 대신 소비자 및 생산자의 부담은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가 매년 2조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양곡유통정책의 효과가 거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왜곡된 유통구조가 가져오는 것은 농촌의 황폐화입니다. 농가의 소득은 줄고 부채는 늘어나니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농림부 국감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농가평균 소득은 2,049만4,000원으로 97년 2,348만8,000원에서 299만4,000원 감소했습니다. 반면 농가 가구당 평균 부채는 97년말 1,301만

2,000원에서 98년말에는 1,701만1,000원으로 무려 30.7%나 늘어났습니다. 농민들이 빚 때문에 최근 3년간 빼앗긴 농지가 1,077만평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동안 농촌을 살리기 대책이 나오고 엄청난 예산이 투입됐으나 결과는 밑빠진 독에 혈세붙기였습니다. 선거 등을 의식한 일회성 대책, 지원 대상농가 선정 등에서의 투명성 부족, 철저한 사후관리 부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일들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고 유통구조가 개선되지 않는한 농촌은 더욱 피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곧 시작될 뉴라운드는 그같은 위기감을 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11월30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리는 WTO 각료회의를 시작으로 본격화하는 뉴라운드는 미국 호주 등 농산물 수출국들의 무역장벽 철폐 주장과 수입국들의 방어로 농업문제가 주요 의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풍요를 구가해야 할 이 가을에 농촌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농촌의 신음은 결국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귀결됩니다. 급증하는 세계인구가 가져오는 것은 식량의 무기화이기 때문입니다.

정재룡·주간한국부 부장 jrchung@hk.co.kr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카카오
배너
2020년 06월 제2830호
  • 이전 보기 배경
    • 2020년 06월 제2830호
    • 2020년 05월 제2829호
    • 2020년 05월 제2828호
    • 2020년 05월 제2827호
    • 2020년 05월 제2826호
    • 2020년 04월 제2825호
    • 2020년 04월 제2824호
    • 2020년 04월 제2823호
    • 2020년 04월 제2822호
    • 2020년 03월 제2821호
  • 이전 보기 배경
저번주 발행호 다음주 발행호
  • 지면보기
  • 구독안내
  • 광고문의
  • * 지면문의
    전화 : 02-6388-8088
    팩스 : 02-2261-3303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 온라인 광고
    전화 : 02-6388-8019
    팩스 : 02-2261-3303
    메일 : adinfo@hankooki.com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많이 본 기사

주간한국 유튜브 채널

서진의 여행 에세이

삼척 초곡항…파도 넘나드는 기암괴석 해변 삼척 초곡항…파도 넘나드는 기암괴석 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