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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양민학살 더 있었다

AP통신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에 이어 왜관교와 덕승교(현 구 고령교)를 폭파해 수백명의 피란민이 숨졌다고 폭로, 노근리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서기로 했던 한미양국이 향후 조사대책을 놓고 부심하고 있다.

AP통신은 미군 자료와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50년 8월초 후퇴하던 미군이 왜관교와 덕승교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수백명의 한국 양민을 살해했다고 14일 보도했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 6주후인 50년 8월3일 미군이 북한군 3개사단에 밀려 낙동강을 따라 후퇴하면서 1기갑사단장 호바트 개이 소장과 일부 장교들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왜관교 및 경북 고령군의 덕승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려 폭파과정에서 어린이와 여성 등 피란민 다수가 살해되거나 익사했다. 참전 미군병사들은 당시 북한군들이 한국인 피란민을 가장해 미군을 공격하는등 전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회고했으며, 교량폭파로 인한 피살자수는 왜관교에서 수백명, 덕승교에서는 수십-수백명에 이른다고 증언했다.

수많은 피란민속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한군 게릴라들의 격퇴 방안을 고심중이던 개이 장군은 3일 밤 15마일 서쪽에 북한군이 모여있다는 보고를 받고 미리 폭약을 설치한 왜관교의 폭파를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미군은 경고사격을 통해 한국인 피난민들에게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나 피란민 행렬은 계속 왜관교를 통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희생자가 적지않았다고 참전 용사들은 전했다.

83년 숨진 개이 장군은 미군 전사에 기록된 글을 통해 “그 다리엔 수백명의 피란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폭파명령을 내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술회, 희생자가 많았음을 시사했다.

또 제14전투공병대대 하사관 출신의 캐롤 킨즈먼은 덕승교 폭파와 관련, “미군들이 밀려드는 피란민 머리위로 총격을 가해 다리가 폭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려 했으나 피란 물결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됐다”면서 “그런 와중에 당일 오전7시1분 상부에서 폭파 명령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당시 14전투공병대 소속 중대원들은 철교인 덕승교 폭파에 대비, 이틀에 걸쳐 총 7,000파운드의 폭약을 설치했다고 증언했다.

왜관·득승교 폭파사건과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미기갑1사단에 의해 이뤄져 수백여명의 양민이 희생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노근리 양민학살은 북한군이 피란민 대열에 위장침투했을 가능성을 우려해 3일간에 걸쳐 양민들을 학살했다면 왜관·득승교 폭파사건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군은 교량폭파당시 사전에 다리 폭파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 피란민 머리 위로 총격을 가하고 교량 폭파 계획을 미리 알리는등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또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이 지역 주민이었던 것과는 달리 왜관·득승교 폭파 피해자들은 전국에서 밀려 왔던 피란민들이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이 때문에 노근리 사건과는 달리 왜관·득승교 폭파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은 어려움이 따를 전망이다.

현지 주민과 칠곡군지, 전사기록 자료 등을 종합하면 대구와 부산이 함락위기에 놓였던 50년 8월1일 미군의 워커중장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워커라인)을 구축하고 격전을 벌이게 됐다.

이에따라 미군은 적도하 방지를 위해 칠곡군 약목면-왜관읍을 잇는 낙동강 왜관교와 낙동강 하류인 고령군 덕승교 폭파를 결정한다.

왜관읍에 주둔한 미군 제1기병사단은 휘하 부대가 김천서 칠곡군 왜관읍으로 철수를 완료하면 왜관교를 폭파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낙동강 연안의 왜관에는 김천-대구간 4번국도를 잇는 유일한 인도교인 왜관교를 통해 수많은 피란민과 군인들로 붐볐다. 7월중순까지만 해도 수십만의 피란민들이 내려와 있었는데다 하순부터는 하루에도 2만5,000명 이상이 낙동강을 건너 좁은 아군지역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피란민들이 길을 메워 군의 작전 기동력에 장애도 되고 특히 적 게릴라들이 끼어 들어와 아군을 교란시키는 사례가 많았다. 이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에는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위해 강안으로 부터 8㎞이내에 거주하는 전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미군측은 피란민들이 사격 위협에도 불구, 필사적으로 따라 넘어오는데다 북한군의 사격이 있자 개이 소장은 3일 오후8시30분 폭파명령을 내렸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칠곡군지에는 ‘다리가 폭파되자 피란민들이 낙동강의 수심이 얕은곳으로 몰려가 미군의 제지를 피해 강을 건넜는데 등에 업은 아기가 익사한 줄도 모르고 건넌 부녀자도 있었고 희생자가 많이 속출했다’고 적혀 있다.

'미적지근' 정부, 진상조사 의지에 의구심

AP통신의 보도를 계기로 전국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유사한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이 잇달아 제기되면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이고 총체적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양민학살 의혹은 노근리 양민학살 경북 칠곡군 왜관교·고령군 덕승교 폭격 전북 익산역 폭격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기총소사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폭탄 투하 경남 마산 진전면 곡안리 총격 경남 마산 창녕읍 여초리 기총소사 등 10여 건에 이른다.

이중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서는 13일 한미 양국이 진상조사와 협의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양자조정그룹’을 구성키로 합의하는 등 조사에 구체성을 띠어가고 있지만 다른 사건들의 경우 조사 방법에 대한 논의조차 이뤄지고 있지 않다.

청와대 박준영대변인은 13일 노근리사건 외에 다른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진상조사 의지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일자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이미 지시한 대로 노근리 학살사건과 함께 당연히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언급은 실무적 뒷받침이 결여된 채 원칙적 입장 천명에 그치고 있어 실천 의지에 의구심을 갖게 하고 있다.

실제로 전북 익산시만 11일 시청 상황실에 피해창구를 개설, 주민들로부터 피해사례를 접수하고 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자치단체들은 접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노근리사건 진상조사대책단 관계자도 “미군 전사에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고 가해자의 증언이 확보된 노근리 사건 조차 실제 조사에 착수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다른 사건의 경우 신경쓸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노근리사건을 우선 조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의 효과적인 방법을 축적한 뒤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이런 입장에는 가해자_미군, 피해자_우리 국민이라는 사건의 성격상 관련 문서와 가해자 증언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측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미국측의 선의를 마냥 기다릴 것만이 아니라 전체 양민학살 사건을 다룰 종합대책본부를 구성, 관련자 증언확보나 현장보존작업, 관련문서 발굴 등 적극적인 진상규명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구=정광진·사회부기자 kjcheong@hk.co.kr

김승일·정치부기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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