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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포도주는 살아있는 술"

하늘이 이렇게 파래도 되는 걸까? 감질나는 서울의 가을 하늘 아래 이태원

을 찾았다. ‘포도주 박사’김길웅(58)씨가 언덕배기 한 와인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모자를 눌러쓰고 푸른 셔츠와 청바지, 빨간 면 스카프에 펜던트까지 두른 블루진의 노신사. 옷차림도 몸가짐도 여간 편안하고 느긋해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자마자 되려 이쪽으로 질문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인터뷰를 하러 간 사람이 오히려 인터뷰를 당하고 있었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 돼도 되는 걸까? 본연의 위치를 찾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가 권한 포도주 한 잔이 약이었다.

“다들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이런 여유가 좋아서 즐기다가 이렇게 포도주를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된거죠. 포도주에 대해 많이 안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자랑할 정도는 아니고, 단지 다른 사람들의 취미가 골프나 낚시인 것처럼 제겐 그 대신 포도주가 있다는 것 정도겠지요.”

한국인 최초로 자신의 이름 내린 포도주 생산

그게 아니다. 취미도 김씨만큼만 하면 이미 취미를 넘어선다. 원래 컴퓨터공학을 전공, 경영학 석사학위까지 갖춘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 그러나 지난 15년에 걸쳐 닦아온 취미가 나날이 발전, 이제는 본업보다 더 주도적으로 인생을 끌어가는 제2의 본업이 됐다. 두드러진 성과도 있다. 한국인 최초로 자신의 얼굴을 내건 독자브랜드를 생산, 경쟁도 치열한 미국의 와인시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그는 사실상 프로다. 최근 국내에서도 몇차례 와인스쿨을 개설해 화제가 된 바 있고, 국내 영자일간지인 코리아 타임즈(Korea Times)에도 2년째 와인칼럼을 집필중이다. 때때로 몇몇 주한외국대사관에서 와인시음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초대되는 와인 전문가다.

이론과 실기도 고루 갖췄다. 포도재배법부터 주조법, 음미법까지 막히는 것이 없다. 다만 너무 환하게 아는 탓인지 때론 강의중 ‘독특한 향기’도 나는데, 요컨대 그가 말하는 최고의 포도주 감별법도 이런 것이다.

“듣기가 좀 이상하겠지만, 사실 적포도주는 옛날에 쓰던 요강 있죠? 그 요

강에서 아침마다 나는 냄새가 진짜 좋은 포도주 냄새입니다. 반면에 백포도주는 자동차 휘발유 맛이랑 같습니다. 왜, 운전자들이 가끔 비상으로 휘발유를 넣을 때 잠깐 빨대로 빨아들일 때가 있잖아요. 그때 순간적으로 혀에 느껴지는 톡 쏘는 맛, 그게 가장 좋은 백포도주지요.”

듣기는 불편해도 믿을 만한 정보다. 그가 아는 상식은 책이 아니라 직접 땅에서, 경험에서 체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직접 가꾸고 수확하는 포도밭도 갖고 있다. 34년째 살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자동차로 약 40분쯤 달리면, 축구장 20개 정도 넓이에 이르는 그의 농장이 나온다. 한번 포도가 열리면 그 양이 트럭 두 대분. 풍작일 때는 최고 500병까지 포도주를 만들어 이웃이나 친구에게 공짜로 나눠주기도 하고, 일부는 이웃 양조장에 팔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작은 ‘노다지’다.

유럽여행서 포도주와 인연, 재배·생산에 나서

포도주와 인연을 맺은 건 파리여행에서부터 시작됐다. 20년쯤전, 그는 사업차 유럽에 갈 일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와인을 물 마시듯 하던 파리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인근 술집을 찾곤 했다. 그 술집들에는 각 테이블마다 각자 자신이 만든 와인을 가져나와 팔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던 제조업자들이 많았다. 그들과 함께 몇 년을 지내다보니 자신도 어느새 ‘세뇌’되고 말았다. 5년이 지난후엔 직접 포도주를 만들어보기로 작정, 일을 벌였다.

마침, 한국에 금새 돌아갈 것 같지 않아 ‘마음의 고향’삼아 사 둔 땅이 있었는데, 처음에 심어두었던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 1,000그루를 미련없이 베어내고 대신 포도나무를 심었다.

시작은 했지만, 어려움은 생각보다 더 컸다. 포도주제조는 많은 땀과 시간, 노하우를 요하는 섬세한 작업. 포도를 잘 재배한 뒤, 수확한 포도를 일일이 으깨어 즙으로 만든 다음 큰 통속에 넣고 이스트를 첨가해 발효, 짧으면 2년 길게는 10년이상 잠재워 만드는, 지루하고도 고된 과정이 진행된다.

처음엔 도처에서 실수가 터져나왔다. 음식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다는 떫은

맛의 포도를 택한 건 잘했다. 그러나 문제는 첫 포도가 열리자마자 주변 산의 노루며 산토끼 등이 죄다 몰려들어 ‘서리’를 하고 갔다. 그나마 남은 건 까마귀가 가만두지 않았다. 나중엔 철조망을 치고 개까지 데려다 놓았다. 또 대학에서 일러준대로 이발소에서 머리카락 몇줌을 얻어다 스타킹에 넣어 걸어놓는 비방(모발에서 나오는 인간의 체취로 짐승이 접근하지 않음)도 썼다.

결과는 한결 나아졌지만, 조금만 철조망이 뚫어져 구멍만 생기면 다시 노루가 찾아와 화를 돋구었다. “그것도 명백한 도둑질”이라고 말하는 그는 요즘도 새떼를 막느라 농장에만 가면 하늘에 대고 공포탄을 쏘며 수시로 일전을 치르는 상황.

다른 작물과는 또 달라 포도주용 포도는 비를 맞는 그날로부터 생명이 끝. 때문에 비소식만 들리면 만사 제치고 비상출동한다. 그 넓은 농장의 포도를 정신없이 따내고는 며칠간 녹초가 돼 드러눕는 일도 많다.

발효제인 이스트 넣는 것을 빠뜨려 아까운 포도즙을 썩혀 버리기도 해봤고, 포도 표면에 붙은 흰색 분말성 입자들이 원래 발효작용을 하는 일종의 박테리아라는 것도 몰라 처음엔 되려 깨끗한 포도주를 만든다고 말끔이 씻어내거나 가게에서 사는 것도 잘 씻긴 것만 골라 사 쓰다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5~10년후쯤 본격적으로 미국시장에 도전해볼 생각

“이게 보통 까다로운게 아녜요. 포도가 자라는 지형이나 기후에 따라서도 맛이 다르고, 발효를 100% 다 시키느냐 80%만 시키느냐, 또 숙성은 얼마나 오래 하느냐 등등 조금만 방법이 달라도 제각각 다른 맛이 나거든요. 말그대로 ‘살아있는 술’이라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대로 또 그 맛이 또 달라집니다. 예술도 이런 예술이 없습니다.”

그가 만든 ‘예술작품’은 오늘까지 대략 수천병. 그러나 본격적인 상업성 제품이 아니라 애호가용 소규모 용도로만 허가돼 있다. 방대한 미국 와인시장에 들어서자면 조건이 훨씬 더 까다롭다. 더 많은 투자와 시설은 물론, 엄청난 액수의 보험에도 가입해야 한다. 아직은 그만한 여력이 없지만 5~10년쯤후엔 한번 도전해 볼 생각도 없지 않다. 단지 미국시장은 미국시장대로 너무 치열해 파고 들기 어렵고, 국내시장은 국내시장대로 너무 황량한 불모지라 위험요인이 많다. 거의 전량을 양조장에 팔고 있는 요즘도 그저 적자만 면했을 뿐,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다.

“와인사업이란게 원래 당대엔 빛을 못 보는 거라고 합니다. 대신 후대에 가서나 덕을 본다고 하죠. 그만큼 욕심을 낸다고 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지요. 저도 지금 겨우 손해만 안 봤다뿐이지 이것으로 급하게 어떤 이익을 보겠다는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기왕이면 언젠가는 잘 됐으면 좋겠다, 그 정도 바랄 뿐이지요.”

선교사 보며 미국꿈 꾸던 소년, 24세때 미국행

굳이 따지자면, 그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의 발단은 한 외국인 선교사에게서 비롯됐다. 대구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쵸콜릿, 껌을 갖고 다니던 외국 선교사들을 보면서 내내 미국꿈만 꾸던 소년. 단 1년에 불과한 국내에서의 대학생활중에도 전공 대신 영어공부에만 몰두했고, 2학기 등록금은 아예 가족들 몰래 영어학원에 갖다 바치다 들켜 크게 혼이 난 적도 있다. 워낙 열심히 한 덕분인지 그의 영어실력은 꽤 높았던 편. 결국 군 제대직후인 24세때 결심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기나긴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컴퓨터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야심속에 산 호세 주립대에서 컴퓨터를 전공, 졸업후엔 기업 부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고, 나중엔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학위도 받았다. 1977년 무렵 우리나라에 PC문화를 가장 먼저 소개한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이후 하이테크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 8년간 사장으로 일했다. 처음엔 직원 5명의 단촐한 기술하청업체에 불과하던 이 회사는 그의 관리하에 꾸준히 성장, 나중엔 50명의 직원에 연간 2,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제법 큰 회사로 변모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오르자 투자와 경영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면서 결국 미국사회에선 보편화 되어 있는 M&A에 의해 다른 대형기업에 회사를 내준뒤 자신은 물러나왔다. 충분한 보상과 함께 명예퇴직한 것이다. 그후 다시 강사로 활동, 일년에 너댓차례 미국과 국내를 오가며 하이테크사업 관련 상담과 강의 등을 맡고 있다.

옛 유학시절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중엔 현직 정치인들이나 재력가들도 다수. 그러나 수십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 이제는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된 그들을 만날 때면 또다른 만감이 교차해 심란해지기도 한다. 또 그의 오랜 외국생활로 알게 모르게 생겨난 문화적 이질감, 못말리는 한국사회의 체면의식 등이 그를 종종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서 정착, 새로운 인생의 도약 꿈꿔

“우리나라 사람들은 뭔가 ‘귀족의식’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든 꼭 까만 양복에 하얀 셔츠,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되고, 친구들끼리 얘기를 할 때도 묻지도 않은 골프 얘기에다 비행기는 1등석 아니면 못 타겠다는 둥 그런 얘기만 잔뜩 되풀이 할 때마다 ‘아, 이게 아닌데’싶은 생각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나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도 많은 것 같고, 조금만 더 권위의식을 버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화합이 잘 될텐데요. 주위엔 ‘한국에 왔으면 한국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지만, 위선이나 체면보다는 솔직하고 편안한 게 저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라도 더 편하고, 취미가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고 편안합니다. 굳이 경계를 할 필요도, 과시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아무리 ‘청바지 입은 50대’를 얕보는 세상이라도 그는 여전히 고국이 그립고 사랑스럽다. 미국에서 평생을 살뻔 했지만 한번도 자신이 미국사람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상황만 허락되면 빠른 시일내 한국에 완전히 돌아올 계획을 갖고 있다. 요즘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틈틈이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농장 터를 알아보러 다니는 것도 그 준비중 하나. 얼마 뒤엔 미국의 한 컴퓨터 회사에 근무하는 부인도 정년퇴직하게 되는데, 그때 받게될 퇴직금과 연금 등 제법 큰 돈이 모이면, 좀 더 본격적으로 와인을 알리고 국내 애호가들을 위한 무료 와인스쿨을 여는 등, 부부의 계획이 다 서 있다.

나이도 별 것 아니다. 아직은 ‘팔팔한’ 50대. 인생의 마지막 단맛이 드는 진짜 숙성기도 어쩌면 바로 지금부터가 아닐까. 포도주박사 김씨의 전성기는 아직 미래형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바라던 끝에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또 결혼했을 때, 그리고 전자사업체 사장으로 있었을 때가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몇번은 더 오겠지요.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에게도 그런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까진 끝이 난 게 절대 아니죠.”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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