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핵 통제시스템 '붕괴 위기'

10/20(수) 20:32

미국의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거부로 세계 핵 통제 시스템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미 상원은 10월13일 CTBT 비준안을 찬성 48명(민주당 44명, 공화당4명), 반대 51명(공화당)으로 부결 처리했다. 미 상원이 국제 군축협정 비준을 거부한 것은 1920년 베르사이유 평화조약 부결 이래 처음이다.

이번 사태로 CTBT 조약 자체가 사문화한 것은 아니지만, 국제 비핵 노력이 크게 후퇴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그동안 CTBT의 국제적 이행을 주도해 온 미국이 스스로 핵 비확산 노력을 포기, 충격이 배가됐다. ‘유일패권국’ 미국의 CTBT 거부는 곧 ‘통제 중단’을 의미하고, 국제 핵질서 와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CTBT는 지난 30년간 인류가 기울여온 핵 감축 노력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다. 핵보유국의 핵실험 전면 금지와 준수여부 확인을 위한 국제사찰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이 조약은 궁국적으로 지구상에서 핵을 완전히 폐기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또 핵무기 비보유국의 핵개발을 봉쇄하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보강해 줄 것으로 평가됐다.

연쇄적 핵통제 시스템 붕괴 우려

미국의 비준 거부가 세계 ‘핵 지도’를 어떻게 변경시킬지 가늠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미국의 눈치를 보며 핵실험을 자제했던 핵보유국들은 ‘핵 개발’의 명분을 얻었다. 중국, 러시아 등 아직 조약 비준을 하지 않은 핵 보유국은 물론이고 인도 파키스탄 등 지난해 5월 이후 핵실험 경쟁에 돌입한 나라들이 추가 핵실험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비준 부결 직후 ‘과잉 반응하지 말아달라’고 세계에 호소했지만, 도덕적 명분을 회복하긴 역부족이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미국의 CTBT 거부가 NPT 체제를 중심으로 한 핵 통제 질서 마저 연쇄적으로 무너뜨릴 가능성이다. NPT는 핵보유 강대국과 비보유국간 빅딜의 산물. 비보유국이 핵무기를 개발·획득하지 않는 대신 핵보유국들은 핵무기를 감축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핵 강국’ 미국이 CTBT 비준을 거부한 마당에 비보유국들이 핵보유를 자제할 것인가.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군축담당 특사로 활동했던 토머스 그레이엄은 “2000년 4월 열리는 NPT 회의부터 군축체체가 와해되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는 세계 안보에 악몽과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미 관계 부정적 영향

한국의 입장에서 주목할 점은 이번 사태가 인도 파키스탄과 함께 조약에 조인 조차 하지 않은 북한의 핵개발 동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제네바 북·미 합의’를 통해 동결 약속을 했기 때문에 심각한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 핵 질서가 흔들리고 미국이 명분을 잃었기 때문에 북한은 핵실험을 재개해야 한다는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이 경우 미국은 94년 제네바 핵합의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도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하고 CTBT 체제에 편입시키려면 미국이 먼저 CTBT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했다”면서 “북미 관계에 먹구름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미국내 당파주의 때문

한편 이번 사태는 미국내 당파주의의 산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내년말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권탈취를 노린 공화당이 클린턴 행정부에 정치적 타격을 가한 측면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비준안이 부결된 직후 클린턴 대통령은 “철저하게 정치적 계산에 의해 희생됐다”면서 국내 정치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96년 9월 CTBT를 첫 서명했으며, 조약 성립을 자신의 집권 2기 최우선 외교과제로 삼았다.

반대로 비준안 부결이 클린턴측의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비준 거부를 빌미삼아 대선레이스를 유리하게 이끌어 보자는 판단으로 애초부터 비준 부결을 유도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비준 거부후 공화당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언론으로부터 온갖 질타를 받고 있으며, 반대로 민주당은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동정표를 얻고 있다.

CTBT의 장래

핵군축 전문가들은 미국의 거부로 CTBT는 최소한 2001년까지 발효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당론을 변경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비준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2000년 12월에 실시되는 선거에서 어느 당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느냐, 또 상원의 의석분포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CTBT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현재 선두를 달리고 있는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아니면 공화당이 여전히 상원의 다수당으로 남게되면 CTBT는 재생의 여지가 없다.

이동준·국제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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