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방콕아시안게임 막이 오르기전 관심의 초점은 종합 2위 탈환과 함께 구기종목의 활약여부였다. 스포트라이트는 단연 야구와 축구에 집중됐다. 메이저리거 박찬호(25·LA 다저스)를 비롯, 프로선수들이 가세한 야구대표팀은 ‘드림팀’ 으로 불렸고 신세대스타 이동국(19·포항) 등이 발탁된 축구대표팀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겨냥한 팀으로 팬들의 주목을 끌만 했다. 여기에 평상시 ‘한지(寒地)볼’ 이라고 자조하던 핸드볼과 역시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토로하기 일쑤였던 하키 등은 남녀 동반 우승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나름대로의 조명을 받았다. 심지어 소프트볼 조차 ‘남·북대결’ 을 이슈로 한가닥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럭비는 없었다. 이번 대회에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비인기종목. 국내에서는 언제 어떤 대회가 있는지, 국제대회에 출전해서는 어느정도의 성적을 올리는지 등 기본적인 것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소외된 종목이었다.

하지만 대회 개막 3일째인 12월 8일 방콕에서 럭비는 우뚝 섰다.

7인제 결승이 벌어진 방콕의 로얄 아미스타디움. 전반을 시작한 지 채 5분이 지나기도전에 대한 럭비협회 관계자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본에 내리 14점을 내줬기 때문이다. 보란 듯이 금메달을 따내 그동안의 설움을 깨끗이 떨쳐버리겠다는 꿈이 깨지는 듯 했다.

그러나 유민석이 6분께 50M가 넘는 거리를 단독 돌파끝에 트라이를 성공시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한국은 이어 김형기의 트라이 성공으로 14-14, 동률을 이룬뒤 후반 완전히 분위기를 돌렸다.

비인기종목 설움 떨쳐낸 ‘눈물으 금메달’

일본에 단 한점도 내주지 않고 박진배, 성해경 등의 잇단 트라이로 단번에 15득점하는 등 결국 29-14로 완승. 구기종목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내는 순간이었다. 럭비의 금 소식은 이날 태권도에서만 한개의 금메달을 보태는데 그치는 등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는듯 하던 한국선수단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었던 낭보였다.

시상대에 올라선 한국선수들의 눈은 붉게 충혈됐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선수, 코칭스태프는 물론, 이제홍 대한럭비협회장 등 관계자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럭비가 마침내 ‘아시안게임 금메달 종목’ 으로 등록되는 바로 그 순간 그동안 묵묵히 참아왔던 온갖 술움들이 새삼 하나하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럭비는 이번 대회 금메달후보 종목 가운데 하나였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뿐 대한럭비협회는 7인제와 15인제 가운데 특히 7인제는 금메달이 유력하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아시아 정상권의 성적을 올렸다는게 자신감의 바탕이었다.

3월 아시안게임 예비고사격이었던 홍콩세븐스에서 이미 플레이트 우승을 차지했고 5월 프랑스세븐스에서는 스페인,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적인 강호들을 제치고 8강에 올라본 적도 있었다. 또 세계규모의 7인제대회는 최상의 리그인 ‘컵’, 2위그룹 리그인 ‘플레이트’, 하위그룹리그인 ‘보울’ 로 나뉘어 치러지는데 한국은 90년대들어 한해 한번이상 국제 7인제대회에서 플레이트 우승컵을 따내기도 했다.

한국 선수단내에서도 이같은 가능성은 인정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저변, 열악한 환경 등을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한국이 일본을 누른 것을 두고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으로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빈약한 저변, 열악한 재정으로 ‘악전고투’

대학 6개팀 실업 4개팀 등 성인팀은 10개에 불과하고 중학교팀까지 포함해야 58개팀에 1,500여 선수라는 빈약한 저변의 한국은 다윗이었다. 반면 6,000여개의 팀에 등록선수만 1만5,000여명에 이르는 일본은 분명 골리앗이었다.

재정적인 문제는 더더욱 선수단을 옥죄었다. IMF 사태이후 명목상 들어오던 후원금마저 끊긴지 오래전. 럭비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대표팀의 합숙비 등 제반경기를 모았을 정도였다. 또 태릉선수촌에 럭비구장이 없어 다른 종목 선수들처럼 입촌도 못한채 상무와 경희대를 오가며 훈련을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대표팀을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로 럭비도 효자종목으로 일어서보자’ 는 일치된 마음이었다. 이를 위해 강동호(27·삼성전관) 박진배(27·삼성전자) 이근욱(28·포항도금강판) 등 기혼자들은 별거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8월 결혼한 백인성(27·삼성전관)은 우승후 “신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 라면서 “그래도 금메달 소식을 아내에게 먼저 전해 주고 싶다” 고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다.

이종호 감독은 “감개무량하다” 면서도 “훈련 시작후 재정지원이 잘 안돼 어려웠다. 사회인팀이 4개에 불과해 대학 졸업생 수용에 어려움이 많다. 대기업들이 팀을 늘려주고 국민들도 럭비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며 그동안 고달팠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여세를 몰아 15인제까지 제패하겠다” 며 투지를 불태웠다.

15인제는 7인제와 달리 포워드진이 한국보다 낫다고 평가되는 등 일본의 벽이 한층 높다. 또 영국식 스타일의 홍콩도 만만치 않다. 실제 한국은 90년대 들어 일본에는 1승4패의 열세, 홍콩에는 5승4패의 박빙의 우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감독은 “이전 전적은 의미가 없다. 아시아선수권 등에서 일본의 주력으로 나왔던 사모아·피지출신의 외국선수들이 나오지 못한다. 일본도 해 볼만한 상대일뿐이다. 더구나 한국은 상승세에 있다” 며 또 한번 기대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럭비가 아니라 국제대회서 효자소리 듣는 종목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었다.

축구하다말고 볼들고 뛰면서 시작된 '럭비'

럭비는 1823년 말 영국에서 축구를 하던 소년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볼을 들고 상대편을 돌파한 것이 계기가 돼 만들어진 종목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제시대이던 1923년 조선체육대회에서 처음 선보인뒤 학교팀과 동호인팀들이 창설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됐다.

선수 15명이 경기를 하는 15인제가 원조이지만 박진감 있고 빠른 경기를 위해 7인제가 성행하게 됐다. 10인제와 13인제도 있다.

경기방식은 공을 갖고 상대편 골라인 밖에 터치하는 트라이로 3점을 얻고 트라이후 부여되는 골킥을 성공시키면 2점을 추가로 얻는다. 또 경기도중 공을 차서 상대편 골대를 넘기는 드롭골을 하면 3점이 주어지고 상대편 반칙으로 패널티킥을 얻어 성공시키면 3점을 얻는다.

상대편 진영을 돌파할 때 하는 패스는 뒤로하는 것이 원칙. 하지만 발로 차서 패스할 경우에는 전진패스를 할 수 있다. 경기장 크기는 가로 70m와 세로 100m이며 경기시간은 15인제는 전후반 각각 40분, 7인제는 7분씩이다.

한국에서는 비인기 종목이지만 유럽에서는 경기규칙이 엄하고 심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경기가 끝난후 상대팀과 함께하는 샤워 등으로 신사의 스포츠로 정평이 나 있다.

김삼우·체육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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