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름이 고혹적이다. 여운포리. 동해안의 이름난 해수욕장 하조대(강원 양양군)에서 북쪽으로 3㎞쯤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동네. 10여년 전, 7번 국도가 왕복 2차선이었던 시절. 피서철 하조대의 여관이나 민박이 동나면 여운포의 청년들은 소달구지나 경운기를 몰고 하조대로 와 숙소를 못찾아 발을 구르는 피서객들을 여운포로 안내했다. 여운포에서 하룻밤 묵는데 하조대의 반 값. 달구지나 경운기에 올라타고 2차선 도로의 중앙선을 달리며 흔들리는 30~40분간의 기막힌 추억은 보너스다. 일단 마을에 머물면 북적거리는 하조대 해변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여운포리 해변은 군사통제지역. 그러나 새까맣게 그을린 군인 아저씨는 담배 한두갑과 도회지에서 온 아가씨들의 미소에 “제가 근무 서는 두 시간 동안 만입니다”라며 철책을 열어 주었다. 소라껍질과 쏟아지는 햇볕, 파도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바다. 허리 정도만 물에 들어가도 지천으로 발에 밟히는 조개, 사소한 쓰레기는 커녕 아무 이물질도 섞이지 않은 순백의 모래밭…. 하지만 행운의 ‘몰래 피서객’들을 정녕 사로 잡은 것은 그 곳 파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서쪽 오대산과 설악산 기슭으로 해가 기울 때, 여운포의 파도는 도술을 부린다. 멀리서 달려 올 때에는 크리스털 블루, 가까와지면서 녹색, 쑥색, 옥색, 연두색, 심지어 노란색…. 하얀 포말로 백사장을 덮을 때까지 파도는 물빛이 지닌 모든 교태를 부린다.

가을의 냄새가 짙어지는 10월 말. 여운포리에는 또 다른 색깔의 물결이 일렁인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갈대의 평원. 10여 그루의 푸른 소나무만 달랑 가운데에 모여 있을 뿐 눈이 닿을 수 있는 끝까지가 모두 갈대이다. 먼바다에서 밀려 온 푸른 파도는 거칠게 해변을 두드리고 그 여운은 땅에 올라 갈색 파도를 일으킨다.

남쪽 지방에서는 전남 순천의 대대포구, 서해안에서는 충남 금강 하구가 대표적인 갈대밭이라면 동해안에서는 여운포리가 으뜸이다. 백사장과 송림, 혹은 절벽으로 육지와 맞닿아 있는 동해. 그 역동적 해안선에 문득 드리워져 있는 평온한 갈대의 벌판은 다른 지역의 갈대밭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갈대밭 너머 보이는 푸른 바다. 묘한 색깔의 스펙트럼이 운치가 있다.

여운포리의 갈대밭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찾는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물론 없다. 강릉에서 양양으로 향하는 7번 국도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웬 벌판”하면서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하조대를 지나 2㎞쯤 북상하면 바다와 키작은 소나무가 눈에 띈다. 다행히 승용차 20여대 쯤 세울 수 있는 노견 샛도로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그물을 말리는 곳이니 주의해야 한다.

가운데를 거닐면서 이삭이 볼에 닿는 간지러움을 느낄 수 있는 억새와 달리 갈대밭은 물가의 질척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가운데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바라보기만 해도 감흥이 인다. 갈대와 억새는 해를 안고 볼 때(역광)가 제격. 당연히 해가 떠오르는 아침나절에 동해안 갈대밭의 절정을 감상할 수 있다.

갈대와 억새

흔히 갈대와 억새를 혼동한다. 크기나 꽃이 피는 시기, 이삭의 모양 등이 비슷해 외견상 구분이 어렵다. 가장 쉬운 구분법은 갈대는 강이나 바다 등 물가에, 억새는 산등성이나 언덕에 자란다는 점. 갈대의 이삭이 갈색이면서 며칠 감지 않은 사람의 머리처럼 뭉쳐 있는 반면, 갈대의 이삭은 백색에 가까우면서 한 올 한 올 분리되어 있다. 인간의 백발을 닮은 갈대와 억새는 생김대로 스러져가는 계절의 상징이다. 희열을 느끼기 보다는 관조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헤아리는데 제격이다.

권오현생활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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