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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세상읽기] 러브레터를 쓴적이 있나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느날 내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을 때/ 무릎이 벗겨져 가슴을 쓸지는 않았는지요/ 당신을 보면 사랑이 샘솟고/ 당신을 그리면 난 불타오른답니다/ 온 몸의 근육이 미동을 멈추고, 나뭇잎과 공기는 숨소릴 죽이죠/ 난 거침없이 사랑에 빠졌어요/ 우린 어울리지 않는 짝이지만 당신이 아니라면/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볼을 스치던 당신의 머릿결/ 눈길을 돌렸다가 다시 한번 뒤돌아보죠/ 신발 끈을 묶거나, 오렌지를 벗기거나, 차를 몰 때에도/ 당신없이 혼자 잠드는 밤에도/ 난 당신의 것입니다’

시(詩)가 아닙니다. ‘첨밀밀’로 유명한 진가신의 영화 ‘러브레터’(10월16일 개봉)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해 쓴 편지입니다. 미국 뉴잉글랜드 바닷가 작은 마을 로브롤리에 이 한장의 편지가 발견됩니다. 봉투도 없고 쓴 사람이 누군인지 알 수 없는 조금은 오래된 듯한 편지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이 정말 잘 익은 오렌지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으면 상큼한 즙이 가득 고이듯 흘러 넘칩니다.

영화는 그 편지의 주인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사랑을 잊고 지냈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이 읽어보게 합니다. 편지는 처음 서점을 운영하는 이혼녀 헬렌(케이트 캡쇼)가 읽습니다. 온통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이런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며, 그 모든 고백들이 사실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헬랜도 그랬습니다. 혼자만 생각하고 살던 그녀는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삶도 조금식 달리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심입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기를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 두 명의 남자란 추측을 합니다. 방학동안 고향으로 내려와 서점에서 일하는 대학생 쟈니(톰 에버릿 스콧)와 오랜 친구 조지(톰 샐릭). 조심스럽게 그것을 확인하는 여자의 모습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편지는 쟈니의 손으로 갑니다. 쟈니 역시

헬렌이 자기에게 보낸 편지로 생각합니다. 그는 그동안 망설여왔던 마음을 조금씩 헬렌에게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잠시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쟈니가 편지를 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렌은 혹시 조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질문보다는 다른 아야기로 물어보는 헬렌을 보고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첫사랑을 고백하듯 쑥스럽고 안스러운 마음을 느낍니다.

헬렌의 친구 자넷(엘렌 드제너러스)역시 그 편지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는 조지가 자신을 좋아해 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예쁜 글씨가 아닌 한장의 연애편지가 작은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사랑에 설레게 한 셈이지요. 아마 그것이 편지가 아니라 시나 어느 책속의 한구절이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뒤에 헬렌은 그 편지가 자기에게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는 찢어버립니다. 그러면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그녀의 가슴은 사랑을 받아들일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워졌는데.

편지는 그녀에게 조지가 그 옛날에 보낸 엽서를 다시 읽게 하고, 그속에 숨어있던 쪽지를 발견하고, 조지에게 그 쪽지의 존재를 몰랐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그 편지의 주인을 밝히지만 그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마을사람 모두의 것이 됐으니까요. 오래전부터 우리는 ‘편지’란 것을 잃고 살고 있습니다. 전화가 있고, 이메일이 있으니 하얀 종이를 놓고 펜을 들고 편지를 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솔직히 편지 한통 부치는데 얼마짜리 우표를 붙여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낡은 것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가을 당신이 만약 손으로 직접 쓴 한 통의 연예편지를 보내거나 받는다면 아마 다를 것입니다. 이처럼 ‘러브레터’는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을 일깨워 줍니다. 그것을 단순한 향수로 즐기든, 새로운 삶의 향기로 받아들이든,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임은 분명합니다.

이대현·문화부 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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