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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스파이] 기업비밀이 새고 있다

IMF는 한국에 뜻밖의 후유증을 가져왔다. 구조조정과 생존에 정신을 뺏긴 사이에 은밀한 공작 세력이 사회 구석 구석에 침투해 한국의 경쟁력을 좀먹고 있다. 공작 세력의 정체는 산업스파이(industrial espionage). 일차적 공작 대상은 기업비밀이다. 보안 전문가들은 “산업스파이와 이들에 의한 비밀 사냥으로부터 안전한 기업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11월8일. 삼성증권에서 영국계 금융회사 리젠트 그룹 한국지사로 최근 직장을 옮긴 한국인 5명이 구속됐다. 삼성증권 인터넷 사업팀원이었던 이들은 회사를 옮기면서 사이버 주식거래 관련 기술과 기밀자료를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삼성증권은 이번 유출사건으로 인해 700억원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주장했다.

삼성증권 사건은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산업스파이 활동의 드러난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정보원의 한 관계자는 “공개된 산업스파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피해 기업이 사건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기업 신인도나 주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건이 공개되는)사법처리 직전 단계에서 묻혀 버린다.”

산업스파이들이 한국을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된 촉매제는 IMF로 인한 자본 국제화. 다국적 기업에 의한 한국기업 사냥과 한국기업 자본잠식률이 커지면서 산업스파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여기다 국내 산업정책에 접근이 용이한 외국인 상주인구가 늘고, 구조조정·규제완화로 기업 보안관리 능력과 보안환경이 저하돼 문제는 증폭되고 있다.

산업스파이들이 노리는 정보는 다양하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절취는 고전적인 양태에 속한다. 이제는 공기업 민영화 계획과 금융사 해외매각, 관급공사 수주 등 대형 국책사업 관련 정보가 표적이 되고 있다. 산업스파이가 단순히 기업비밀 뿐 아니라 국가 경제정책까지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스파이와 스파이를 고용하는 의뢰인은 내외국인, 국내외 기업을 망라한다. 하지만 피해의 심각성을 따지면 아무래도 정보의 국외유출이 더 크다. 국가경쟁력에 직접적인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2월 발생한 삼성반도체와 LG반도체의 64MD램 및 256MD램 핵심기술 유출 사건. 의뢰인은 반도체 후발 경쟁국인 대만의 NTC사였고, 기술을 빼돌린 국내 ‘매개회사’는 전직 삼성반도체 연구원들로 구성된 KSTC사. 만약 이들 기술이 완전히 유출됐다면 국가 손실액은 최대 6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양사가 천문학적 연구비를 투입해 수년간 개발했던 기술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셈이다.

국내에서 활동중인 외국인 산업스파이 수는 얼마나 될까. 국정원의 추산은 IMF 이전인 96년에 약 400여명. 보안관계자들은 최근 수년간 수가 급증했다고 말한다. 이들 중에는 사설정보업체(정보 브로커) 소속원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것이 국정원의 분석이다. 실제로 기업 신용조사·평가를 대행하는 외국의 유수 정보 브로커들이 이미 한국에 지사를 설치해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F그룹 및 K, P사 등이 그들이다.

첨단 전자장비로 무장한 전직 정보기관원 등으로 구성된 이들 브로커의 정보수집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국가안전국(NSA) 간부출신이 창립한 F그룹은 자회사 7개와 150개국에 지사 및 에이전트를 두고 있다. 이 그룹은 구소련 국가안보국(KGB)의 전직 대간첩조직 총수와 합작해 활동하고 있으며 미 정부를 대신해 인질범들과 석방교섭을 벌인 경력을 갖고 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K사도 350명의 요원으로 25개국에서 지사를 운용하고 있는 다국적 정보 브로커다. 이 회사는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인 이멜다 여사의 스위스 비밀계좌를 찾아낸 적이 있다.

이들 브로커의 의뢰인은 한국에 진출했거나, 진출을 희망하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인수 대상 기업의 내부자료나 정부 구조조정 방향 등에 대한 핵심 정보를 빼내는 것이 의뢰인들의 요구다. 브로커들이 한국에 지사를 설치하는 것 자체는 물론 합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의뢰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예로 국정원은 지난해 미국의 K사가 빅딜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국내에 침투, 정치인들의 계좌추적까지 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관계자들은 브로커들이 평소 지사 형태로 암약하지만 때로는 지난해 8월처럼 떼로 몰려와 활동한다.

물론 산업스파이 행위는 국내기업끼리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올 10월초 현대전자 직원이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침입, 화상처리장치 등을 훔치려한 혐의로 구속됐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이같은 사건은 최근 수년들어 급증 추세에 있지만 정확한 피해 건수와 피해액 집계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절취된 기밀은 언제든지 부메랑이 돼서 해당 기업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산업스파이에 의한 경제손실과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기업보안협회(ASIS)는 96년 한해동안 1,300개 기업에서 1,100여건의 산업스파이 사건이 발생해 3,000억 달러 가치의 정보가 해외로 유출됐다고 추산했다. 92년 발생한 산업스파이 사건은 246개 기업에서 589건. 4년만에 피해기업이 5배 이상 늘었고 건수도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미국은 이에 따라 96년 ‘산업스파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정보유출의 국내외 여부에 따라 처벌 강도에 차등을 두었다. 기술이 국외유출된 경우 개인은 징역 15년 이하에 벌금 50만 달러 이하, 단체는 벌금 1,000만 달러 이하를 물리도록 했다. 국내로 유출했을 때는 개인은 징역 10년 이하에 벌금 25만 달러 이하, 단체는 500만 달러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우리나라도 올 1월 부정경쟁방지법의 영업비밀보호조항을 강화했다. 기술을 해외 유출한 개인에게 7년 이하 징역과 1억원 이하 벌금, 국내유출의 경우에는 5년 이하 징역에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처벌강도는 선진국에 비해 한참 낮다.

산업스파이 활동이 일반화하면서 기밀절취 수법도 다양화하고 있다. 절취수법은 ‘합법을 가장한 방법’과 ‘비합법적 방법’으로 양분된다. 전자에는 핵심정보 소유자 스카우트, 업체간 기술협력관계, 산업연수 및 시찰·견학기회를 이용해 정보를 빼내는 방법이 포함된다. 도청과 해킹, 매수, 위장취업 등은 후자에 속한다.

국정원이 조사한 산업기밀 유출 유형을 보면 경쟁업체 직원 스카우트가 가장 많았다. 이어 매수, 합작사업·기술협력, 복사, 팩스·전산망 해킹, 시찰·견학, 산업연수, 공동연구 순이었다. 기업의 적이 안팎에 모두 있는 셈이다.

산업 스파이가 노리는 정보는 어떤 분야일까.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제조기술이 57.4%로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했으며 기초과학도 21.9%를 차지했다. 이밖에 판매·시장정보(13.7%), 사업계획정보(3.9%), 생산계획(2.7%), 설계기술과 미특허 아이디어(0.1%) 등이 사냥감이었다.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안팎의 스파이로부터 당하는 것은 의식의 국제화가 자본의 국제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인들의 지적재산권 보호개념과 보안의식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꼽는다.

사원과 연구인력은 기업비밀 유출의 잠재적인 매개자다. 이들은 또한 IMF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애사심을 갖게 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기업가에게 있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시황은 북방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통일제국 진(秦)을 15년의 단명으로 끝나게 한 것은 이민족이 아니라 내부분열이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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