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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자 '문건'에 상처난 이종찬

이른바 ‘언론대책’문건 파문이 여권을 휩쓸면서 할퀸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이번 파문이 결국 여권의 주장대로 마무리가 돼가는 형국이어서 대외적인 정치적 타격은 최소화할 수도 있겠지만 내부에 깊게 패인 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게 됐다.

문제의 문건이 국민회의내 신주류의 중심처럼 여겨져 오던 전 국가정보원장 이종찬부총재의 사무실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극구 부인하고 있으나 문건파문 전개과정에서 드러난 국민회의내 신·구주류간의 갈등양상은 권력내부의 역학관계와 그 변화양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구주류측 이종찬부총재에 냉랭한 반응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집권한 지 1년반이 지났지만 여권의 권력주체가 그리 공고한 토대와 결속력을 일구지 못했고 따라서 외풍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문건파문의 와중에서 신·구주류는 대외적으로는 서로 감싸고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짐짓 애를 썼으나 이들은 돌아서면 서로 상대방에 대하여 불만을 털어 놓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구주류에 속하는 국민회의 한 고위당직자는 문건사건의 본질을 “한 기자가 차기 대권주자를 자처하는 인사에게 잘보이기 위해 어줍잖은 짓을 저지른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이번 사건이 공당의 책임있는 인사 주변에서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인 만큼 일차적으로 ‘자칭’대권주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꼬집는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또 다른 고위당직자는 97년 대선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좀더 적나라하게 이부총재를 겨냥한다. 이 당직자는 “이부총재는 그때도 덜렁대는 스타일이었으며 우유부단해서 되는 일도 없었고 안되는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저변의 기류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국민회의 지도부는 국정원 기밀문건 반출로 이부총재가 결정적으로 불리한 지경에 처했을 때에도 “이부총재 개인의 일이다”면서 “진상을 밝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한때 국민회의주변에서 이부총재 인책론, 당직 사퇴론은 물론 출당론까지 극단적인 얘기들이 춤을 췄던 것도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부총재 당지도부에 불만

국민회의 당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들 범구주류에 대한 이부총재측의 불만도 만만치가 않다. 이부총재측이 당초 문건 작성자가 중앙일보 문일현기자임을 정의원의 폭로 다음날 당에 귀뜀했을 때는 이를 곧바로 언론에 공표하라는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부총재측의 주장이다.

문건작성자가 한나라당 정형근의원 폭로처럼 이부총재나 이강래 전청와대정무수석이 아닌 것이 확인된 만큼 좀더 여유를 갖고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 사태 해결수순을 밟아 갔어야 했다고 이부총재측은 지금도 믿고 있다.

이부총재의 한 측근은 “당이 이부총재를 한 식구로 생각했다면 그렇게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당과 정부가 똘똘 뭉쳤다면 이부총재가 이렇게까지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심지어 이부총재측은 당 지도부가 부분적으로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으며 한나라당 정의원에 대해서도 국회파행및 정국운영 부담 등을 이유로 ‘끝장’을 볼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정의원에 대한 사법처리는 유야무야로 끝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이부총재측은 ‘명예회복’에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게 됐다는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부총재측이 당 지도부에 대해 잠재적인 경쟁자의 타격을 은연중 ‘즐기고’있다는 혐의를 두고 있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권력핵심부, 갈등봉합에 나서

이렇게 갈등의 골이 폭발 일보직전 까지 갔을 때 권력 핵심부로부터 모종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구주류의 핵심인 이른바 ‘동교동계’가 이부총재의 검찰 출두를 전후해 돌연 이부총재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다.

국정원이 이부총재가 반출한 문건은 ‘별 것 아니었음’을 발표한 것을 시발로 당 지도부는 이부총재에 대한 보호막을 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후에는 김대중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갖는다. 동교동계를 일거에 움직일 수 있는 힘은 현재로선 김대통령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 지도부는 “대통령께서 이부총재에 대해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는 말을 반공개적으로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에도 불구, 구주류의 속마음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이 금세 드러났다.

한화갑사무총장은 9일 비공개로 진행된 국민회의 소속 기초단체장 정책세미나에서 “이부총재는 ‘자신있으니 나한테 맡겨달라’고 했다”면서 “그러다가 당이 뒷북만 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한총장은 내친 김에 “문건전달자인 평화방송 이도준기자가 한나라당 정의원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폭로돼 한나라당 입장이 곤란하게 됐는데 바로 그날 느닷없이 이부총재가 국정원장 퇴임때 서류를 몇개 갖고 나왔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이기자건은 쑥 들어갔다”면서 “그 때문에 야당에 또 다른 빌미를 줬고 가지치기를 해 (의혹이) 증폭됐다”고 말했다.

신·구주류 모두에 ‘상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렇다고 구주류가 이부총재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주장은 억측에 가깝다는 점이다. 한총장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고 이부총재가 더욱 곤경에 빠진 것은 대부분 그 자신의 대응미숙및 발언실수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관련설을 말하면서 녹취록 존재여부에 대해 왔다갔다 한 것이나 사무실 서류창고가 뒤짐을 당했다고 실토, 국정원 문건반출 논란에 불을 붙인 것도 바로 이부총재 본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은 이번 사건과정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문제점 즉, 신주류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신주류가 말만 요란했지 실은 이름에 걸맞는 실체를 갖추는 데는 실패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신주류가 나름대로 구주류와 호각을 이룰만한 실세를 형성하고 있고, 또 이번 사건과정에서 이런 신주류 진영의 ‘브레인’이 입체적인 대응을 했다면 문제는 비교적 조기에 가닥을 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주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신주류가 결과적으로 유명무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는 상황은 그러나 구주류에게도 역설적으로 치명적일 수 있다.

무엇보다 집권 중반기에 접어 들기까지 권력기반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 실패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외면했다는 중차대한 문제의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태성·정치부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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