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산업스파이] 비밀, 안전지대가 없다

산업시찰단의 일원으로 기업을 참관하고 떠나는 외국인이 방문기념품으로 만년필을 건넸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받은 사람이 기업비밀을 취급하는 위치에 있다면 우선 보안점검부터 하는 것이 좋다. 도청장치 등이 만년필속에 장치돼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만년필 속에 도청장치가 있다면 아예 파괴하든지, 아니면 이를 이용해 역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 외국기업의 한국지사나 에이전트가 도청하는 것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007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기업간 정보전쟁에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산업스파이 전쟁은 이제 남의 호의도 검증해야 할 정도로 치열하다.

산업스파이 활동 형태는 냉전시절 미·소간 첩보전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총성과 유혈이 없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산업스파이의 유형은 ‘경영 컨설팅사·정보 브로커 등 제 3자 활용’‘경쟁사 위장취업’‘내부인 매수·고액 스카우트’‘해외출장 기업인 상대 정보절취’‘시설방문·침투’‘문서복제’‘도청’‘사이버 용병 활용’‘매개회사 이용’등으로 엄청나게 다양하다. 물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미인계도 포함된다.

P종합상사 임원 K씨는 유창한 영어와 빼어난 미모의 S마담에 반해 E요정의 단골손님이 됐다. 99년 여름밤 K씨는 신사업에 대한 신용장 발송 상담이 성사돼 바이어와 함께 E요정을 찾았다. K씨는 S마담도 함께 한 자리에서 상품 종류와 가격, 확장계획 등 핵심 사업내용을 언급했다. 얼마 후 K씨가 바이어로부터 신용장 발부 취소통보를 받았을 때 사업은 경쟁사인 Y종합상사에 넘어가 있었다. 미인계에 넘어간 경우다. 반대로 고위 경영자의 여비서를 유혹하는 ‘로미오 수법’도 있다. 여비서의 사생활도 기업비밀 유지와 무관치 않게 된 셈이다.

섣부른 회사참관 허용도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 넥타이에 슬쩍 묻혀가는 화학물질은 핵심 기밀 유출로 연결된다. 전문연구원들 중에는 냄새만으로 주조용 화학물질의 배합비율을 알아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구두밑에 자석을 달아 바닥의 금속가루를 수집하기도 한다.

공장내부의 먼지도 기밀에 속한다. 일본의 한 금속연마제 제조업체 직원이 미국 경쟁업체를 방문했을 때 손수건에 먼지를 닦아 온 적이 있었다. 일본업체는 이 먼지를 분석해 경쟁업체 연마제의 성분을 알아냈다. 업계에서는 이미 전설이 된 이야기다.

노트북 컴퓨터 훔치기는 정보화 사회와 함께 발전한 영역. 노트북 하드 디스크에 회사의 중요 정보가 수록된 경우가 많아 경쟁업체에게 때로는 노다지가 될 수도 있다. 95년 한해동안 미국에서는 20만8,000대의 노트북이 도난됐다. 이 때문에 미국 기업들 뿐 아니라 삼성전자, LG전자, 삼보컴퓨터 등 국내기업들도 노트북에 중요 자료를 저장하지 말도록 교육하고 있다.

컨설팅사는 정보를 도매금으로 쓸어갈 잠재력을 갖고 있다. 컨설팅에 참고용으로 필요하다며 각종 기밀자료을 요구하면 내주는 경우가 많다. 이 자료들이 복사된 뒤 경쟁업체로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국내 중견 전자업체가 최근 이 수법에 당한 적이 있다. 해외 유력기업과의 기술협력도 요주의 대상. 우위에 있는 기업이 일방적으로 국내기업에 기술정보를 요구한 뒤, 기술이전은 계속 미루는 수법으로 정보를 도둑질한다.

글로벌화에 따라 전문가 초빙연구를 비롯한 기술협력·공동연구 역시 위험에 노출됐다. 동남아의 K연구소는 외국 기술자를 초청해 공동연구를 하게 한 다음 정보를 빼냈다. 외국 기술자가 외출할 때 마다 미리 준비해 둔 열쇠로 연구실과 금고를 열어 자료를 복사한 것이다. 동남아 A사는 기술연수 명목으로 보낸 직원을 스파이로 활용했다. 합작사의 첨단전자 기술이 입력된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아내 기밀을 빼내도록 한 것.

해외 기업이 국내의 매개회사를 통해 정보를 절취하는 수법은 비교적 신종에 속한다. 지난해 2월 삼성반도체와 LG반도체가 64MD램 기술 등을 도둑맞은 것이 대표적. 국내 벤처기업과 기술도입 계약을 맺어 정보절취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문제가 되더라도 해외의 의뢰기업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우리는 (매개)회사와 기술도입 계약만 했지, 정보를 빼오라고 한 적은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도청도 구식이지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수단이다. 비행기 일등석(중역들은 대부분 일등석을 탄다) 좌석밑에 도청기를 장치해 출장중인 중역들의 대화를 엿듣는 수법, 구두미화원을 매수해 기업간부들의 구두 뒤축속에 소형 도청기를 삽입하는 수법 등 교묘한 기법이 동원된다.

도청과 직원 매수, 위장취업 등은 피해자가 피해 여부를 조속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악영향이 더욱 크다. 즉시 피해가 확인되는 문서절취 등은 여기에 비하면 조악한 수법이다. 고액 스카우트로 연구원이나 핵심 기밀 취급자를 빼가는 방법은 기밀도용 사실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법적 다툼의 여지를 남긴다. 연구원의 경우 입사 전 갖고 있던 지식과, 입사 후 연구원 신분으로 얻은 지식, 전직 후 새로 취득한 지식간의 구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급속한 정보화에 따라 사이버 용병을 동원한 사이버 테러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 사이버 테러는 정보절취 뿐 아니라, 해당기업의 정보망을 파괴하기도 한다.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컴퓨터에 수록된 정보를 파괴하는 논리폭탄, 전자기장을 발생해 자기기록을 훼손하는 고출력 전자총, 악의적 내용의 전자우편을 무차별 살포하는 스팸, 토론방에 기업이나 경영진에 대한 악성루머를 유포하는 플레임 등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플레임은 해당 기업의 주가와 신인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산업스파이 세계에서 더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카카오
배너
2020년 05월 제2828호
  • 이전 보기 배경
    • 2020년 05월 제2828호
    • 2020년 05월 제2827호
    • 2020년 05월 제2826호
    • 2020년 04월 제2825호
    • 2020년 04월 제2824호
    • 2020년 04월 제2823호
    • 2020년 04월 제2822호
    • 2020년 03월 제2821호
    • 2020년 03월 제2820호
    • 2020년 03월 제2819호
  • 이전 보기 배경
저번주 발행호 다음주 발행호
  • 지면보기
  • 구독안내
  • 광고문의
  • * 지면문의
    전화 : 02-6388-8088
    팩스 : 02-2261-3303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 온라인 광고
    전화 : 02-6388-8019
    팩스 : 02-2261-3303
    메일 : adinfo@hankooki.com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많이 본 기사

주간한국 유튜브 채널

서진의 여행 에세이

아산 지중해 마을…이국적 파스텔톤 골목 아산 지중해 마을…이국적 파스텔톤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