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직장ㆍ국가에 충성이 사라진다

12/29(수) 18:19

IMF는 보통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과거 직장은 착실한 보통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안식을 제공했다. 커가는 나라의 힘도 보통사람들에게는 보람의 상징이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국가도 부강해지고, 따라서 자신들의 미래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과 직장, 국가의 일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직장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토로를 들어보자.



“국가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얼마전 남편 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적이 않좋은 투자상담사 등 4명이 해고됐다. 증권사 투자상담사의 대부분은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다. 신분불안이 항상 따라 다닌다. 애사심이 적을 수 밖에 없다. 회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할 뿐이다. 국가가 고용불안을 해소해 주지도 못한다. 국가에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다.”(G증권사 직원 부인 K씨·35)

“최근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부장 10명이 잘렸다. 인사팀에서 ‘부장님 수고하셨습니다’는 전화통화가 각 부장에게 왔다고 하더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장들은 조용히 짐싸서 떠났다. 내가 보기에는 연봉높은 부장을 해고하는 것이 결코 경쟁력을 높이는 게 아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 아니냐.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 회사에 어떻게 충성하겠나. 정부도 싫다. 선진국 제도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냐. 한국이 미국이냐. 이젠 내것 내가 챙기는 수 밖에 없다. 안그러면 나만 손해다.”(대기업 계열사 과장 Y씨·39)

“국가에 기대 안한다. 정치가 나아지리란 희망도 갖지 않는다. 졸업 후에는 자영업을 하고 싶다. 적게 벌어도 마음 편하게 살면 최고다. 회사에 들어가긴 하겠지만 그렇게 오래 몸담을 생각은 없다. 독립하는데 필요한 준비단계일 뿐이다.”(서울지역 S대 3학년 L군·27)

“과거 정식직원으로 일할 때는 회사가 자랑스러웠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IMF로 정리해고 돼 용역업체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옛날 일하던 회사로 출근하지만 이제 이 회사와 나는 별개다. 급여는 형편없지만 그냥 집에서 놀기보다는 나아 나온다. 경기가 좋아졌으니 회사에서 다시 정식직원으로 채용해주면 더 열심히 일할텐데.”(용역업체 파견근로자 K주부·43)

“내가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된 건 다 정치인들 때문이다. 이회사 저회사 기웃거린게 벌써 1년이 넘었다. 나라고 정치고 다 싫다. ‘확 망해버렸으면’하는 생각도 든다. 망해버리면 너나 나나 모두 똑같을 것 아니냐.”(해고 근로자 P씨·47)



직장·국가에 대한 충성 사라져

중산층이거나, 중산층에서 추락한 보통사람들의 의식이 변하고 있다. 어찌보면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보통사람들의 동력이 꺼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추세로 과도기적 아노미 현상에 불과할까. 아니면 우리사회의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는, 재정비의 대상일까. 보통사람들이 직장과 국가에 더이상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들은 다른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

경희대 임성호 교수(정치학)는 일단 이 문제를 자연스런 추세로 보고 해결책을 도출하고자 한다. 임 교수의 이야기. “시민들이 기존의 조직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는 것은 산업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유럽과 미국을 보더라도 특정 권위체(조직)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 사회가 파편화하고 인간이 원자화하다 보니 조직에 일체감을 못느끼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정치권에 대한 불만족이 이같은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임 교수는 IMF가 시민의식에 급속한 변화를 초래했다고 강조했다. “IMF 이후 집단에 대한 충성도가 특히 떨어진 데는 IMF 이전의 기대수준이 너무 높았던 탓도 있다. 기대수준의 거품화 현상에는 장밋빛 미래만 제시하는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

IMF로 거품이 붕괴됐지만 기대수준은 쉽게 낮춰지지 않는다. 주관적 기대수준과 객관적 현실간의 괴리가 커지면서 조직과 국가에 대한 일체감 붕괴도 증폭됐다. 과거 국가주의 아래 유지됐던 국민의 정신적 동원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를 연착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기대수준을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정치인을 비롯한 공공 리더들이 미래를 과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목전의 총선 때문에 이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보통사람 당사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다시 임 교수의 이야기. “국민들도 국가의 역량이 예전같지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사회의 분절화로 인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다는 시민사회육성이 바람직

그는 이같은 분명한 흐름속에서 보통사람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탈국가화 현상을 중화시키는 것과 함께 대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보다는 시민사회를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임 교수는 비정부기구(NGO)의 활성화를 통한 동류의식과 사회적 참여 확대를 대안의 하나로 제시했다.

어윤대 고려대 경영대학원 교수(국제금융센터 소장)는 충성철회 현상이 IMF 이후 정리해고제, 연봉제 도입 등으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 교수는 “이같은 의식구조 변화가 반드시 생산성 감소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다. 생산성은 결국 기업들이 변화한 조건에 맞춰 관리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의식구조 변화의 상당부분은 고용불안에 기초하고 있다. 고용불안이 회사에 대한 애착심 결여로 연결되고, 또다시 (고용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철회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 사장은 “재산과 연령에서 사회의 중추가 되는 보통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전제하며 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그는 문화적 차이를 도외시하는 경제정책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세계화 추세를 쫓아간다는 이유로 무작정 영·미형 표준을 수용하는 것은 문제다. 미국의 가치는 우리와 다르다.

미국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웠다. 한국 보통사람들의 정신적 갈등은 최근 영·미형 사고 형태와 산업구조가 동시에 유입되면서 나타나는 경향이 강하다. 문화적 토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서구 자본주의적 방식을 무작정 받아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식으로 소화해서 정착시키지 않으면 생산성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 점은 정부가 크게 잘못하고 있다.”

IMF의 터널을 빠져나온 21세기 한국은 경제구조 뿐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의식구조까지 변화시키는 상황을 맞고 있다. 조직에 대한 충성의 철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은 또다른 도전을 맞고 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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