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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살기 힘든 세상, 미래가 없어요"

모 대기업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H(38)씨. 그는 IMF 이후로 이전에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린 뒤 아이들을 생각하며 집까지 정신없이 뛰어가는 버릇이다. 새 밀레니엄을 맞는 보통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보통사람을 자처하는 H씨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편집자 주>



-집마련 어떻게 했나.

“10년간 모은 전세금에 은행대출 4,100만원을 보태 97년 말에 20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아직 대출금 못다 갚았다.”



-한달 수입과 저축액은.

“연봉 3,100만원이다. IMF전에 3,400만원이었는데, 한때 2,700만원까지 깎였다가 회복된 것이다. 생활비쓰고 대출금, 연금보험금 넣고 나면 고향에 부쳐드릴 돈도 안 남는다. 저축은 생각할 수도 없다. IMF전에는 년 700만~800만원을 저축했지만 IMF로 연봉이 줄고, 금융비용이 많아져 못한다. 빠듯하게 사니까 있는 돈 없는 돈 다쓰게 되더라. 미래계획도 같이 실종됐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나.

“큰애가 세살, 작은애는 생후 10개월이라 과외비는 안든다. 큰애를 동네 놀이방에 보내는데 한달 7만~8만원 든다. 애들 장난감에 돈이 약간 나간다. 퇴근 후에 아이들과 장난치고, 같이 목욕하기도 하며 놀아준다.”



-술은 어떻게 마시나.

“일주일에 두번꼴로 마신다. 대부분 회사 동료들과 호프집에 가거나,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마신다. 술값은 절반 정도가 회사 회식비로 처리되고 절반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데 한달에 20만원 남짓이다. 한달 용돈 40만원의 절반이 술값이다. 술자리에서 이야기는 업무관련이 3분의 2를 차지한다. 고용불안, 대우가 안좋다거나, 직원들을 혹사시킨다는 등의 회사 씹는 얘기가 많다. 누구는 어떻다는 식의 상사 이야기도 한다.”



-동창들과의 관계는.

“1년에 한두번 만난다. 옛날 이야기나 현재의 업무, 신상관련 이야기가 주로 오간다. 출세한 동창을 보면 ‘잘됐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돼나, 나도 뭐 뾰족한 수 없나’는 식으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 대한 애착심은.

“점점 없어진다. 어차피 받는 만큼 주는 것 아니냐. 회사가 직원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데 누가 회사에 몸바쳐 충성하겠나. 해고당한 사람들을 보면 남아있는 직원들은 ‘토사구팽’을 떠올린다. ”



-언제까지 회사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나.

“부장까지는 갈 것 같다. 임원되기는 경쟁이 치열해 보장 못한다. 임원이 되려면 업무능력 뿐 아니라 대인관계, 상사의 신뢰, 인맥, 지연, 회사 분위기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IMF때는 임원과 부장들이 대거 해고당했다. 시대상황과 운도 따라야 하는데 예측불가능이다. 직장 옮길 생각은 별로 없다. 한번 옮긴 적이 있다. 어느 회사라고 특별하겠나.”



-후배들에게 추격받고 있다는 생각은 없나.

“아직 한 적 없다. 후배들이 갈수록 업무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근무시간에 인터넷을 이용한 주식투자에 더 관심을 보이는 실정이다. 추격당한다는 생각보다는 ‘후배들이 빨리 일을 익혀야 업무를 분담시킬텐데’하는 걱정이 앞선다. 옛날같으면 근무중 주식투자는 엄두도 못내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요즘은 상사들도 회사가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니까 크게 간섭안한다. 나도 하고 싶지만 업무책임이 너무 커 못한다.”



-2000년대에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

“구체성없이 ‘잘되겠지’하는 막연한 희망을 갖는다. 뭔가 관련분야에서 새 품목을 찾아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생활이 권태롭게 느껴지나.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업무적으로 애착심이 줄고, 회사에 대한 실망이 늘면서 옛날보다는 못하다. 경영오너의 지배구조와 봉급생활자의 한계를 느끼면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보람도 줄었다.”



-부의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는데.

“정부의 세제정책에 분개한다. 가진 자에게 엄정히 집행하지 않아 부익부 빈익빈을 차단하지 못한다. 복지정책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차피 경제발전 논리가 우선하는 우리나라 수준에서 뭘 바라겠나.”



-하루 일과는.

“8시 출근해 12~1시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8~9시 퇴근할 때까지 줄곧 일한다. 집에 도착하면 보통 10시가 넘는다. 일에 찌들어 아이디어를 짜내거나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꿈도 못꾼다. 체력에 위기를 느껴 넉달전부터 수영을 시작했다. 일주일 3번, 새벽에 나간다. 업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퇴근 후 부부사이의 이야기는.

“주로 애들과 가족들 이야기다. 회사 이야기도 더러 한다. 같은 팀 직원과 상사에 관한 이야기다. IMF 전에는 회사 비전 이야기도 했지만 이젠 아예 안한다. 아내가 오히려 불안해 하기 때문이다. IMF 전에는 미래설계도 했지만 이젠 이야기해 봐야 마음만 답답하고, 걱정밖에 안되니까 가급적 피한다.”



-가정 생활은.

“생일되면 케이크와 선물을 사준다. 애들은 장난감, 아내에게는 용돈에서 5만~10만 정도의 옷을 선물한다. 휴일에는 주로 아내 장보는데 따라가고, 야외로는 두달에 한번 꼴 나간다. 소형 승용차가 있지만 출근은 버스로 한다. 유지비는 보험료와 기름값 등을 합해 한달 5만~10만원 정도 든다.”



-요즘 주식열기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허황된 꿈을 쫓고 있는 것 같다. 심정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출근시간에 하는 것은 업무방해 요인이다. 하지만 자구책 차린다는데 굳이 말릴 수는 없지 않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느끼고 있나.

“보통사람이라고 느끼지만 중산층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개념이 모호하긴 하지만 30평대 아파트에다 애들 장래 교육비, 노후설계, 저축 등의 여유가 있어야 중산층 아닌가. IMF 전에는 중산층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착각이었다.”



-중산층이 대접받고 있다고 느끼나.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정부정책과 정치권 이념이 명확하지 않다. 때로는 중산층을 위하는 듯 하다가, 어떤 때는 역행한다. 정치이념이 없으니까 실행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특장이 있다고 보나.

“때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남이 쉽게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위축될 때도 있지만 내가 평범한 존재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남들이 벤처기업하고, 창업하는 것을 보면 ‘리스크가 큰 만큼 (돈벌)기회도 클 것으로 보인다. 부럽지도 않지만 엄두가 안난다. 자리가 잡힐 때까지 먹고 살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집안에서 돈대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목매다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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