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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히틀러와 루즈벨트

20세기도 며칠 남지 않았다. 왜 새삼스럽게 아돌프 히틀러를 생각하는 것일까. 왜 또 그를 자살로 끌고간 프랭크린 루즈벨트를 떠 올리는 것일까.

세계 최대의 언론 박물관인 ‘뉴지엄’(www.newseum.org)은 20세기 마지막 해인 올해초 금세기에 일어난 100대 사건을 선정했다. 선정에는 67명의 역사학자, 저명 언론인들이 이번 세기 500항목의 사건중 25개를 고르게해 그중 100개를 순위별로 자리 매김 한 것이다.

1위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와 일본의 항복(1945년)이다. 2차대전 종결을 으뜸으로 삼았다면 이를 일으키고 이를 방어한 히틀러 총통과 루즈벨트 대통령은 ‘새삼’저무는 이 세기에는 떠오르는 인물일 수 밖에 없다.

히틀러는 100대 사건중 5개가 포함됐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7위, 1945년) ▲독일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대전 발발(15위, 1939년) ▲독일 히틀러 시대 개막·나치당 등장(22위, 1933년) ▲독일항복 연합군 승리(37위, 1945년) ▲히틀러 반유태인 폭력승인(93위, 1938)등이다.

루즈벨트에 관한 것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 미국 2차대전 참전(3위, 1941년) ▲뉴딜정책 추진(34위, 1933년) ▲원자탄 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 극비추진(64위,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76위, 1932년) 등 4항목. 여기에 그의 사후 일어난 ▲독일항복·연합국 승리(37위, 1945년)▲미국 원자탄 실험(48위, 1945년)등은 그가 주도한 것들이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주관상학적, 점성술적 인연은 있는것 같다. 히틀러는 1933년 1얼30일 독일공화국의 총리가 됐다. 루즈벨트는 5주후인 3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30일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했다. 루즈벨트는 이에 앞서 4월13일 플로리다에서 뇌일혈로 숨졌다.

히틀러의 루즈벨트에 대한 선망과 적의는 그의 대미관인 동시에 세계관이며 그의 인격과 성격을 잘 드러낸다. 둘은 한번도 맞 부딪힌 적은 없으나 이런 성격과 세계관의 차이로 패자와 승자의 갈림길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1939년 4월14일 루즈벨트는 알바니아를 침략한 이탈리아와 그의 동맹군 독일에 경고 친서를 보냈다. 21개 나라에 앞으로 10일간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히틀러 총통은 4월28일 의회에서 공개적인 답변을 했다. 이 연설은 ‘전쟁(제2차세계대전)을 가리키는 바늘’이었다.

히틀러는 연설했다. “루즈벨트 대통령 각하. 당신나라의 크기와 당신나라의 엄청난 부가 당신으로 하여금 전세계의 운명과 모든 민족들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이해 합니다. 나는 훨씬 보잘 것 없고 작은 틀 안에 있을 뿐이지요. 나는 세계의 운명에 책임감을 느낄 수는 없군요. 이 세계는 내 민족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요... 나는 21년전에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민족의 노동자이며 병사의 자격으로, 내 자신이 힘으로 모든 일(700만 실업자 구제, 1919년 빼앗긴 제국 땅 찾기, 1,000년만의 독일통일)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당신은 그에 비해 너무 쉬웠습니다. 내가 1933년 수상이 되었을 때 당신은 미 합중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로써 첫 순간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의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나의 세계는 공간적으로 훨씬 좁아요. 이 세계는 오직 내 민족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연설에 대해 요하임 페스르는 그의 ‘히틀러 평전’에서 수사학적으로는 평화를 바라는듯 하지만 베르사이유 국제 협약상의 모든 약속을 민족의 이름으로 내다버리는 기만이며 전쟁선포의 음폐라고 평가했다.

페스르는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고 볼때 히틀러라는 악마적인 성격의 인간이 평화로 갈 수 있었던 20세기를 대량살륙과 전쟁의 길로 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 유산은 아직도 이라크, 유고, 북한 등 세계 곳곳에 짓밟히는 민족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런 ‘악의’에 대적하는 것은 루즈벨트의 민주주의, 실용주의, 계몽주의가 아닐까고 그는 시사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작은나라건, 큰나라건 ‘전쟁이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도덕성을 루즈벨트는 1942년 권두교서에서 주장했다.

히틀러는 ‘행운의 루즈벨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 벙커에서 기뻐 하면서 독일의 승리를 다시 꿈꾸는듯 했다. 그러나 그를 지켜본 측근은 “히틀러의 천사의 날개는 이미 방을 통해 지나갔다”고 느꼈다. “죽더라도 전쟁으로 세계에 기념비를 세우겠다”는 그의 염원은 페허만을 베를린에 남겼다.

‘전쟁으로부터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 고립주의자들의 반대속에 전쟁에 참가한 루즈벨트는 그 페허위에 승자라는, 평화라는 탑을 세웠다. 역사는 그의 이름을 언제고 승자의 편에 올리게 했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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