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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없고 표만 있다"

“국회 좀 달라지게 할 수 없을까요?”

15대 국회가 마지막까지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지난해 내내 방탄국회로 세비만 낭비하더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에 몰려가 회의 자체가 열리지 않는가 하면 그나마 남아있는 의원들은 이익단체들에 밀려 개혁법안을 잇따라 변질시키는 등 막판까지 국민들에게 짜증을 안겨주고 있다.

의원들뿐만 아니라 각 당과 정부까지 나서 각종 장밋빛 정책과 방침을 발표해 일각에서는 총선이후에 대한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표의식, 법안개혁성 변질

이번 국회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익단체들의 로비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의원들도 이익단체들이 선거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의식해 법안의 개혁성을 마구 훼손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제개혁안중 부가세법 개정안. 정부는 현행 특례과세제도가 영세업자 보호라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탈세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에 따라 봉급생활자와 자영업자의 과세형평을 맞추기 위해 특례과세제도를 장기적으로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법안을 제출했다.

재정경제부가 국회에 제출한 당초 법안에는 내년 7월부터 과세특례제도를 없애는 대신 연매출액 2,400만~4,800만원인 과세특례대상자를 간이과세대상자로 전환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 재경위는 7일 간이과세 기준금액을 ‘4,800만원 이상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금액’으로 후퇴시켰고 법제사법위는 이를 ‘4,800만원에 30%(1,440만원)를 추가한 범위내에서 시행령으로 정한다’고 정했다.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은 이에 대해 “선거에 눈이 멀어 자영자 소득파악이라는 국가적 개혁과제를 내팽개 쳤다”고 반발했다. 시민단체들은 “자영업자의 소득파악을 제도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부가세 과세특례제와 간이과세제도 폐지는 조세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며 “조세개혁을 후퇴시켜 선심을 사려는 국회의원들은 그것이 선심이 아니라 오히려 낙선의 지름길임을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경실련과 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은 의원 8명에게 총선때 보자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냈다.

정부는 또 대주주들이 상장주식거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을 막기위해 현행 20%의 단일세율을 바꿔 20~40%의 누진세율을 적용키로 했으나 국회심의과정에서 보유한지 1년내에 매도할 경우에만 적용키로 축소했다. 대주주들의 경우 보통 주식을 장기보유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법취지가 유명무실해진 셈이다.

로비에 밀려 낮잠자는 법안 수두룩

김대중 대통령이 8·15 경축사때 발표했던 소득분배개선을 위한 세제개혁안중 핵심조항들이 국회심의를 거치면서 없었던 일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정부가 교육개혁차원에서 우여곡절끝에 겨우 62세로 단축했던 교원정년을 법안통과 1년도 채 안돼 다시 환원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은 교원정년을 각각 63세와 65세로 늘리는 법안을 이번 국회에 제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정부와 국민회의가 아직 기존 62세정년 방침을 고수하고 있지만 상임위 의석 등을 감안할 때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힘을 합치면 법안통과는 시간문제다. 이처럼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교원 정년을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34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교원들과 그 가족들의 표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른바 힘있는 단체들의 로비에 밀려 제대로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법안은 부지기수다.

재경위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소비자에게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할 경우 제조업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결함제조물책임법(PL법) 제정안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회기내 처리가 난망한 실정이다. 또 복수단체화를 골자로 한 공인회계사법 개정안도 소위에서 잠자고 있다.

이밖에도 법제사법위는 동성동본 금혼 조항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이 상정됐으나 여성계와 유림의 틈바구니에서 아직 심의를 못하고 있고, 변호사법 개정안을 개악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자 상임위 상정을 보류하고 있다.

한전의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는 전력산업구조개편 촉진법도 한국노총과 한전노조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산업자원위에 가까스로 상정됐으나 한나라당이 이번 회기내 통과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전력산업구조개편 촉진법은 본격적인 공기업 구조조정의 시금석이라는 점에서 처리여부에 따라 앞으로 정부의 구조조정 일정은 물론 재벌개혁 등 여타분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공방에 밀려 휘청거리는 것이다.

건설교통위에는 택시운전사 월급제도입을 골자로 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 상정됐으나 기존 사납금제 유지를 주장하는 사업자측과 법안통과를 주장하는 노조측의 눈치를 살피느라 심의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의원들은 개혁법안의 후퇴와 민감한 법안들을 방치하는데 대해 여론이 곱지 않자 “국회심의과정에서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선거에 영향을 미칠까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의원들의 자리이탈로 법안처리가 지연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1일 본회의에서는 150명인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49개안건중 일부 법안에 대한 심사보고만 듣고 산회했고 7일 본회의에서는 의원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가 10개 안건을 처리하지 못했다. 예결위는 8일 오전에는 정형근의원이 KBS보도진때문에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다는 야당측 주장에 공전을 거듭한데 이어 한나라당이 정치개혁협상과 예산안을 연계할 방침이어서 장기표류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개혁의지도 크게 후퇴

정부도 당초 개혁의지에서 후퇴하거나 총선을 겨냥했다는 의혹을 받을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재경부는 미상장 주식의 증여를 통한 재벌들의 변칙 상속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상속증여세법을 개정하면서 특수관계인의 직접증여와 증여후 3년내 상장시에만 시가과세토록 해 시민단체들로부터 “실효성이 극히 의심스러운 ‘이빨빠진 종이호랑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정부는 또 호화사치주택의 양도소득세를 강화키로 했다가 국무회의를 거치면서 호화주택의 기준을 5억원에서 6억원으로 늘려 사실상 대상자가 없게 됐다. 상속세나 증여세 포탈의 경우 시효없이 평생 과세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방침도 세무공무원이 탈루사실을 안 날로부터 1년이내에 과세하고 탈루재산가액도 50억원이상으로 제한해 당초 의지가 크게 퇴색한 셈이다.

이밖에도 건교부는 8일 총 74조원을 투입해 4개 광역권 개발계획을 발표해 야당으로부터 총선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내년도 공공근로사업예산 1·4분기 집중배정방침과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영세민 주거개선사업에 일용직 근로자 1만5,000여명을 참여시킨다는 발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와 국민회의가 9일 청와대에서 당정회의를 갖고 농가부채 3조원에 대한 특별지원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도 주무부처인 농림부조차 재원조달방안에 난색을 표하는 등 총선을 겨냥해 급조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국민회의가 새천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추진하려던 밀레니엄사면은 형평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민회의는 당초 200만~300만원 정도의 소액 신용카드연체, 휴대전화통화료 체납 등의 신용불량자에 대해 금융감독원에 블랙리스트해제를 건의할 방침이었다.

또 불가피하게 부도가 난 부정표단속법위반자 등 IMF체제 이후 경제사범 가운데 형집행이 끝났거나 벌금을 완납한 사람을 복권시키는 방안도 추진했다. 금융권에서 거래를 제한하고 있는 연체자 등이 7월말 현재 248만명에 이르러 신용거래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행권은 “똑같이 역경을 겪으면서도 가산을 팔거나 다른 빚을 내가며 꼬박꼬박 대출금을 갚아온 우량고객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생계연체가 아닌 휴대전화 사용료 연체까지 사면해줄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도 만만치 않자 8일 당8역회의를 통해“방안만 제시했을 뿐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없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이처럼 정치권이 이익단체의 로비에 휘둘려 각종 개혁법안을 변질시키고 총선만 의식한채 국정을 소홀히 하자 정치개혁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참여연대 홍일표간사는 “정치개혁의 핵심은 인적 청산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며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국회의원들이 내년 총선에서 낙선되도록 국민들이 심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songy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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