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제휴로 공색의 길 모색

12/30(목) 10:30

‘잡종강세(雜種强勢)의 법칙’

1764년 독일의 식물학자인 조셉 쾰로이터(Joseph Kolreuter)가 담배의 품종개량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법칙이다. 말 그대로 부모 세대가 유전적으로 혈연이 멀수록 우수한 자식들이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유난히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는 ‘잡종강세’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만 서양에서는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법칙이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이후 모든 것이 미국식으로 바뀐 탓일까. 그동안 유난히 경영의 ‘순혈주의(純血主義)’를 고집하던 한국 기업들이 2000년을 앞두고 ‘잡종강세의 법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메가머저(Mega Merger·대규모 합병)’로 불리는 대기업끼리의 인수·합병이 벌어지는가 하면 경쟁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엄청난 시너지효과 노린 합병

‘메가머저’의 대표적 사례는 국내 최대 이동통신업체인 SK텔레콤(011)이 신세기통신(017)을 인수한 것. SK텔레콤은 12월20일 신세기통신의 1, 2대 주주인 포철과 코오롱의 지분을 전량, 인수해 신세기통신의 주인이 됐다고 발표했다.

가입자 기준으로는 이동통신 시장의 57%를, 매출규모로는 60%를 차지하는 공룡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갑작스런 공룡기업의 탄생으로 업계에서는 한국통신 프리텔(016)과 LG텔레콤(019), 한솔PCS(018) 등 나머지 3개 통신회사도 생존을 위한 또다른 인수·합병(M&A)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시장점유율 40%로 이동통신업계에서 이미 ‘부동의 1위’를 굳힌 SK텔레콤이 굳이 신세기통신을 인수한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포철에 따르면 이번 인수·합병으로 예상되는 시너지 효과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4조원이 넘는다.

우선 차세대 이동통신으로 불리는 ‘IMT-2000사업’에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공동으로 참여, 중복 투자비용 1조5,000억원이 절감된다는 것이다. 또 양사가 주파수 및 기지국을 공동으로 사용, 관리해 2조원의 절감효과가 있으며 전문인력의 공동활용 등을 통해서도 5,000억원의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순혈주의’를 포기하고 경쟁 기업과의 제휴가 추진되고 있는 분야는 이동통신업계만이 아니다. 2000년에 ‘2차 구조조정’이 예정되어 있는 은행권에서는 ‘한빛-조흥’, ‘외환-국민’, ‘신한-하나-한미’등 다양한 짝짓기 방식이 거론되고 있으며, GM의 대우자동차 인수로 위기에 몰린 현대자동차 역시 외국 업체와의 제휴를 물밑에서 추진하고 있다.

이같은 기업간의 제휴열풍에 대해, LG경제연구원은 ‘21세기 Win-Win 전략’이라는 자료를 통해 “21세기에는 전략적 제휴를 통해 서로의 핵심역량을 공유하는 길만이 최선의 생존전략”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름 바꾸기로 브랜드가치 극대화

새천년을 맞이하는 한국 기업들의 또다른 생존전략은 ‘이미지 관리’이다. 삼성, LG그룹 등 대부분의 재벌들이 ‘물건만 잘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들의 브랜드를 또다른 자산으로 인식, 계열사의 브랜드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삼성카드 홍보팀 임명선 주임은 “삼성그룹은 지난해부터 각 계열사들의 브랜드 가치를 최대화하는 장기계획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들의 ‘이미지 관리’는 지난 6월부터 벌어진 ‘이름 바꾸기’에서도 확인된다. 주식시장이나 코스닥시장에서 자신들의 주가가 제대로 오르지 않자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전관이 삼성SDI로, 위성방송 수신기 생산업체인 청람이 청람디지탈로, 대양산업은 하이론코리아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기업들의 21세기 생존전략은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동반하고 있다. 우선 기업들이 ‘순혈주의’를 포기하면서 그동안 종업원들에게 보장해온 ‘평생직장’도 함께 포기했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98~99년 동안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각 기업마다 10~20%가 넘는 직원들이 직장을 떠나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2000년에도 고용불안은 한국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다소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코스닥에 등록한 기업들이 이름만 바꿔 주가상승을 노리는 경우도 주식 투자자들에게는 큰 문제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11월이후 코스닥에 등록됐거나 상장을 추진중인 기업들이 사업내용에 관계없이 ‘~바이오’, ‘~링크’, ‘~텔’등 인터넷이나 생명공학 분위기를 풍기는 영어단어를 회사이름에 붙이고 있다”며 “초보 투자자들은 물론 증시사정에 밝은 투자자들마저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요컨대 2000년을 맞이하는 한국 기업들은 유망업종으로의 전환, 실력있는 배우자와의 결혼과 이미지 관리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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