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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강원도 정선 정암사

개천의 바위가 온통 붉은 색이다. 폐광에서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이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철골구조물을 씻어 내려온 물은 계곡의 돌과 모래에 잔뜩 녹을 입혀 놓았다.

산기슭에 겨우 붙어있는 다 쓰러져가는 하꼬방, 사자(死者)의 썩어들어간 눈처럼 시커먼 창문의 주인 잃은 아파트, 탄차의 기적소리에 놀란 듯한 매케한 바람….

강원도 정선의 남쪽 끝자락인 사북과 고한은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아직 탄광촌의 풍광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삼척탄좌, 동원탄좌 등이 여전히 석탄을 캐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곳에 탄광이 들어선 것은 1948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면서부터이다. 50년이 넘게 제 땅과 살을 파내 국가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던 이 곳의 산천은 그 치열했던 열정 만큼이나 처절하고 착잡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룩한 생산자였지만 ‘막장’으로 내몰렸던 많은 광원들의 눈물어린 삶도 곳곳에 묻어있다.

고한에서 만항쪽으로 뚤린 414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르면 왼편으로 호젓한 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탁한 계곡의 물은 절 앞의 상류까지는 제색깔이다. 현판에는 태백산 정암사(淨岩寺)라고 씌여있다.

석탄을 캐기 전까지 깨끗한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흘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암사는 진흙밭에 핀 연꽃같이 정갈하고 고요하다. 땅과 하늘이 탄가루로 뒤덮였던 때에도 이 절은 그 깨끗함으로 이 곳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탄때와 눈물때를 씻어주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에는 그가 만든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는 중국에서 직접 가지고 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가사(옷)를 나누어 봉안하면서 다섯 채의 적멸보궁을 지었다. 그중 정암사 적멸보궁은 마지막에 만들어진 보궁이고 자장율사는 이 곳에서 입적했다. 적멸은 열반의 다른 말이며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뜻한다. 사찰의 법당 중 으뜸이다.

새로 단장한 일주문에 들어서면 티끌 하나 없는 마당이 펼쳐진다. 우람한 축대 위에 세워진 육화정사가 왼쪽으로 보이고 범종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적멸보궁은 범종각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가슴 높이의 야트막한 돌담이 에두르고 있는 적멸보궁과 그 앞뜰은 차분하게 단장된 정원처럼 운치가 흐른다.

고색이 깃든 기둥과 단청이 하얗게 날아간 서까래, 귀퉁이가 비바람에 깎여둥글 넙적하게 된 돌계단…. 보궁은 파란 기와를 올린 지붕을 제외하고 옛 세월 속에 멈춰 선 듯하다. 왼편으로는 작지만 위엄있는 향나무가 솟아있다. 자장율사가 지팡이를 꼽아놓았는데 싹이 나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설명이 쓰여있다. 사실이라면 수령이 1,300살이 넘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모든 적멸보궁이 그렇지만 이 곳에도 불상이 없다. 수미단에는 빈 방석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사리는 보궁 뒤에 있는 절벽 위 20m 지점의 수마노탑에 봉안돼 있다.

석회암 벽돌을 채곡채곡 쌓아올리고 상륜부를 청동장식으로 씌운 수마노탑은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7층모전석탑이다. 탑에 가려면 보궁 오른편으로 난 비탈 계단을 약 200m 올라야 한다. 정암사의 전경이 고즈넉하게 내려다 보이는 수마노탑에서 참배객은 묵상에 잠긴다.

즈믄해를 보내고 맞으며 마음을 정갈하게 추스릴 수 있는 곳. 정암사는 피폐해 검게 변해버린 산골짜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생활과학부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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