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뿌리를 찾아] 곡부(曲阜) 공(孔)씨

12/30(목) 11:28

곡부 공씨는 단일본으로 인구수는 5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인구순위로는 56위다. 경기 평택과 전남 여천을 중심으로 전국에 산재되어 살고 있다.

공씨의 시조는 성인 공부자(孔夫子). 공자의 이름은 구(丘)요, 자는 중니(仲尼)이다. 중국 주나라에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BC479-522)의 찬평향취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에서 아버지 숙양홀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2540년전이다.

본래의 성은 자(子)씨로 송(宋: 중국성씨 또는 나라 이름)의 민공(閔公)의 후손으로 황제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공부자가 탄생한지 2540년을 공기(孔紀) 또는 성기(聖紀)라고 한다.

공자의 어머니 안(顔)씨가 니구산에서 지극한 정성을 들여 기도한 끝에 회임 11개월만에 태어나던 날 풍악소리가 들렸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범상이 9척6촌으로 사람들이 장인이라 했다.

공자는 3세때 부친을 여의고 가정이 매우 빈곤하였으나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고 만년에는 역(易:주역)에 심혈을 기울여 위편(韋編:책을 매는 가죽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전에 통달해 당나라 고종때 처음으로 국학의 묘(廟)를 세웠으며 따르는 제자가 3,000명이 넘었고 그중에서도 육예(六藝: 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한 현인 72명이 십철(十哲)의 고제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공자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는 윤리도덕을 설명하여 사람들의 진로를 밝힘으로써 성인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으니 석가 예수와 더불어 세계삼대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공자는 도탄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으며 이상적인 통일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왕도정치를 부르짖었으나 이에 호응하는 제후가 없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서 후진교육에 전념하면서 춘추의 저작 등에도 몰두하였다.

공자는 요순(堯舜)임금을 이상적인 군주로 찬양하고 우(禹) 탕(湯) 문무(文武: 문왕과 무왕) 삼왕을 추대함으로써 공자 이전의 중국을 체계화시켰다. 그의 사상은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양 여러나라에서 정치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조선조 시대가 유교의 극성시대로서 유교에 배치되는 사상을 논하는 자에게는 사문난적이라는 극악한 죄명이 적용되기도 했다.

공자의 말씀은 선의 좋은 점과 악의 나쁜 점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곡부는 지난 60년대 모택동의 문화혁명때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이제는 중국 정부에서 300만달러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650여년전에 봉헌된 공자의 동상을 포함하여 완전히 복구됐다. 옛 지위를 되찾아 국가적인 성지로서 중국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생존 당시에는 난세의 제왕들이 성인의 도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후세에 와서 비로소 깨닫고 당나라 현종때 시호(諡號)를 문선왕이라 했고, 송나라 진종때 지성, 원나라 무종때에 대성을 각각 추가하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외에 후세의 군주들이 왕 또는 성인, 선성, 선사 등 최상급의 칭호로서 추앙했고, 동양에서는 공자묘와 권리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드리고 있다.

공자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것은 고려말 우왕때.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다. 공소는 원나라 순제때 한림학사를 지낸 석학으로 고려 충정왕 1년(1348) 원나라 황족인 위왕의 딸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결혼하여 고려국에 올 때 공주를 수행했다. 공소는 그 인물됨이 인정되어 평장사의 벼슬에 올랐다. 그뒤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졌다.

공소의 본명은 공소(孔昭)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려 제4대 임금 광종의 휘(諱:죽은 뒤의 이름)자가 ‘소(昭)’자여서 이를 피하기위해 실사자 획수인 ‘紹 ’자로 사용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로부터 450여년이 지난 조선조 정조18년(1794)에 중국 산동성의 옛이름인 곡부를 본으로 삼았다. 공소의 묘소는 경남 마산시 예곡동 407(두릉)에 조성되어 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추원재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제향하고 있다.

공소의 아들 여는 고려조때 태학사의 벼슬에 오르고 평장사와 지응양군천우위대장 등을 지냈다.

공소의 손자 공부(어촌공파) 공은(고산공파) 두형제가 있는데, 공부는 우왕2년에 문과에 올라 태학사 등을 지내고 조선국이 개국한 뒤 검교한성부윤과 보문각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태종16년(1416)에 천추사로 명나라에 가서 큰 공을 세우고 귀국하였다. 그는 석학으로 젊어서부터 정포은 이목은 등과 교류하였다. 공부는 또 서예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가 쓴 필체가 한산군 이색신도비로 한재까지 남아있다. 종친회 공신택(0339)373-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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