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칼럼] 먼지 쌓인 진열대속의 보석들

12/30(목) 12:07

대여 순위 상위권 비디오들은 다 ‘대여중’ 표가 꽂혀있고, 주인이 내 얼굴을 기억해줄 정도의 단골도 아니어서 짱 박아두었다가 내줄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연말연시의 대여점 성수기. 재미와 감동이 소위 대박 프로라는 것 못지 않은, 덜 알려진 영화들을 골라 여유 있게 즐겨보자.

젊은이들의 사랑과 성, 장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묘사한 영화들이 지치지 않고 출시되고 있다. 최근 출시된 것 중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로는 <뷰티플 걸> <다크 사이드 오브 더 선> <댄서, 텍사스> <광끼> <때로는 모든 걸 잃어볼 필요가 있다>를 꼽을 수 있으며, 여성이 주가 된 영화로는 <잠들 수 없는 밤> <수잔나> <조 브레이커> <벨라 도나>가 있다.

이처럼 남녀별로 나열해보니 여성의 비중이 높은 영화일수록 에로틱한 면이 강조되었음을 알겠다. 일시적 감정 폭발에 휘말려 일단 불륜을 저질러 놓고 뒷수습을 못하거나 일에 대한 성취 욕구가 지나쳐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인물로 묘사되는 여성. 할리우드 영화는 아직도 여성을 인간으로서 배려하지 않는다.


젊은날의 고민ㆍ방황 그리고 사랑

<왓 에버 What ever>(18세 이용가 등급, 콜럼비아 출시)의 감독은 수잔 스쿵, <줄리엣 루이스의 프리 섹스 Some Girls>(18세 이용가 등급, 시네마트 출시)의 감독은 로리 켈리로 모두 젊은 여성 감독이다.

그러나 여성 감독이라는 측면을 굳이 내세우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며 청춘의 어느 한 때를 묘사할 뿐이다.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시나리오를 쓰고, 아기자기한 연출력을 보인다.

<왓 에버>는 고등학교 졸업반 안나(리자 웨일)가 주인공이다. 생활 능력이 없어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새 출발을 꿈꾸는 어머니를 경멸하는 안나. 화가를 꿈꾸지만 입학허가나 대학 등록금 모두 걱정거리다.

안나의 창조성을 높이 사는 미술 교사(프레드릭 포레스트)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몸을 놀리는 친구 브렌다(쉐드 모간)와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낭비한다. 안나가 자신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기까지를 분방하게 따라간다. 안나역의 리자 웨일은 사려깊은 눈빛과 솜털이 남은 뽀송한 피부로 그 시기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줄리엣 루이스->는 킹카 애인에게 채여 상심한 클레어(마리사 리비시)가 바람둥이 채드(제레미 시스토)를 이상적인 남성으로 여겨 정신없이 빠져들다 정신을 차리기까지를 그린다. 그녀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분방한 친구로, 그 나이 또래에선 최고의 개성과 연기력을 과시하는 줄리엣 루이스가 분하고 있어서 이처럼 야한 우리말 제목이 붙었다. 빨간 머리 앤이 성장하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라고 여겨지는 마리사 리비시라는 여배우의 매력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영화다.

여성 감독의 작품 하나 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인이었던 여배우 손드라 록은 적은 돈으로 꽤 볼만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었다. <첩혈여경>에 반한 이들이라면 <두 미 페이버 Do Me A Favor>(18세 이용가 등급, 시네마트 출시)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연상의 여자에 대한 흠모를 통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진 한 청년의 성장 드라마인가 하면, 숨막히는 환경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불운한 여성과 청년의 파격적 여행을 그린 로드 무비이기도 하다.

두 주인공이 처한 숨막히는 환경에 대한 묘사는 무리한 상황 설정을 납득시키고 동정을 끌어낼 정도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형의 자살로 우울한 집안. 고등학생 링컨 에이브(데본 군머쉘)는 오늘도 도서관에서 억지 공부를 하고 있다. 친구들의 꾐에 빠져 술심부름을 하게되는데, 수퍼 주인은 미성년자라며 내쫓는다. 그때 나타난 매혹적이고 무례하며 도발적인 여성 알렉스(로잔나 아퀘트)가 링컨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50년대 말론 브란도의 '청춘의 모습'

50년대 청춘 문화를 대변하던 청년이 있다. 남자 배우들이 모두 그와 같이 되기를 꿈꾸는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말론 브란도가 구현하는 반항적인 남성상. 검은 가죽 잠바와 가죽 부츠, 날카로운 눈빛을 숨긴 푹 눌러쓴 모자, 오토바이에 올라타 냉소를 흘린다.

<대부> 이후의 비만한 말론 브란도만을 알고 있는 팬이라면 제임스 딘과 함께 반항하는 청춘의 상징이었던 젊은날의 그의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이다. 라즐로 베네덱 감독의 1954년 작인 흑백 영화 <와일드 원 The Wild One>(12세 이상가 등급, 콜럼비아 출시)은 말론 브란도를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마을에 오토바이 폭주족을 끌고 온 리더 조니(말론 브란도).

이 권태로운 마을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캐시(메리 머피)가 “무슨 일 할거냐”고 묻자 “Nothing”이라고 내뱉는다. 기성 세대에 반항하면서도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무기력한 청춘다운 답변이다. 소동 끝에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조니 일당은 메카시 시대의 마녀 재판에 희생된 이들을 상징한다는 평가를 받았는가 하면, 고독한 서부 영웅의 현대적인 버전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조직'은 어디서든 두려운 존재들

루이스 모뉴 감독의 <메이드 맨 Made Men>(12세 이상가 등급, 스타맥스 출시)은 바로 다음 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야기 꼬임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액션물이다.

물량 공세보다는 탄탄한 이야기, 거듭되는 반전과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스릴은 아이디어가 돋보이던 감독의 전작 <레트로액티브> 못지 않다. 자신이 속한 갱 조직의 정보를 알려주는 대가로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이 되어 새로운 신분의 메이드 맨이 된 빌(제임스 벨루시). 그러나 조직은 그가 숨어사는 작은 마을까지 손을 뻗쳐 빌은 아내 데브라(바네사 엔젤)를 피신시킨 후 정면 대결에 돌입한다.

빌이 빼돌린 돈냄새를 맡은 밀주업자들과 악독 보안관(티모시 달톤)까지 끼어들어 살인, 폭파, 탈주, 배신의 피비린내나는 두뇌, 몸싸움이 펼쳐진다.

아내나 보안관도 믿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메이드 맨>의 주인공 심정을 잇는 영화들이 더 있다. 마이크 바커 감독의 <씨크릿 Best Laid Plans>(18세 이용가 등급, 폭스 출시)은 현재-과거-현재를 오가는 시제에다 연인의 사랑을 담보로 한 게임, 마약 밀매, 검은 조직의 협박, 법률 상식 등을 동원한 음모물이다. 엄청난 빚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 때문에 마약 밀매에 가담했다가 조직의 쓴맛을 보게된 닉(알렉산드라 니볼라). 4만불을 마련하기 위해 애인 캐시(리즈 위더스푼)와 공모하여 갑부 저택에서 일하는 친구 브라이스(조쉬 브로린)를 이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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