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감독의 애니메이션중에 ‘반딧불의 묘’라는 작품이 있다. 두 남매를 통해 태평양전쟁 이면에 숨겨진 일본 보통사람들의 참혹했던 모습을 고발한 88년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을 합리화했다는 비판에도 불구, 동정심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외국 시장에서도 호평받았다. 애니메이션 수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국시청자 입맛에도 맞는 주제와 내용 선택이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10~12일 싱가포르 선텍시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 TV프로그램 견본시장인 ‘MIP-ASIA 98’. 30개국 258개업체가 참여한 이번 행사는 애니메이션이 수출 주력프로그램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획단계부터 외국시장을 겨냥한 꼼꼼한 전략이 필요함을 일깨운 행사였다. ‘애니메이션 왕국’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중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참가국 대부분이 애니메이션을 대거 선보였으며,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3사와 아리랑TV 삼성영상사업단(캐치원 Q채널) m.net 대교방송 DCN 등 케이블TV 6개사 등 국내 참가업체도 애니메이션을 2, 3편씩 출품, 짭짤한 재미를 봤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삼성영상사업단이 내놓은 13부작 애니메이션 ‘알렉산더’. 유럽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제작 ‘이온 플럭스’를 만들었던 재미동포 애니메이터 피터 정이 메인캐릭터 디자이너로 참여, 기획단계서부터 관심을 끈 이 작품은 한국 판매부스중 가장 많은 외국 바이어들을 끌어들였다. 삼성영상사업단 관계자는 “고대 마케도니아지방을 무대로 삼아서 외국시청자들의 이해가 쉬운데다 피터 정이라는 애니메이터의 명성도 흥행을 보증해주는 것 같다”며 “수출협상만 잘 진척되면 최소 250만달러어치 이상을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BS 프로덕션이 출품한 26부작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도 큰 호응을 얻은 경우. 롤러브레이드와 리모컨 자동차라는 특이한 소재와 현대사회의 수질 오염문제를 다룬 주제의식이 돋보였다는 평이다. 독일 독립제작사 베타필름은 편당 1만달러에 프로그램을 구매키로 계약, SBS 프로덕션 수출액 39만6,000달러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밖에 KBS 영상사업단이 출품한 65부작 애니메이션 ‘외계소년 위제트’도 대만 톱인사이트사에 7만8,000달러에 팔렸으며, 케이블TV 만화채널 투니버스가 내놓은 13부작 ‘영혼기병 라젠카’도 수출상담액(가계약포함) 5만달러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한길프로덕션이 제작한 70분짜리 애니메이션 ‘난중일기’는 바이어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판매를 대행한 아리랑TV 관계자는 “전투중 피튀기는 장면, 조선장수가 왜장을 칼로 베는 장면 등 외국 TV방영기준을 도외시한 폭력장면이 바이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고 말했다. 개인자격으로 판매부스를 설치한 재캐나다 애니메이터 넬슨 신(에이컴 대표)씨는 “한국은 OEM방식으로만 만화영화를 제작했던 나라이므로 국제경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무엇보다 한국문화를 배경으로 하되 전체 스토리는 국제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행사를 통해 KBS는 드라마 ‘욕망의 바다’등 58만5,000달러, MBC는 드라마 ‘해바라기’등 47만2,000달러, SBS는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등 39만6,000달러, 케이블TV 6개사는 113만5,000달러의 프로그램 수출가계약을 맺은 것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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