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번 그러다 말 줄 알았다. 재미삼아 하기엔 돈도, 품도 여간 많이 드는 일이 아니다. 97년 대선 당시 출마후보들에 대한 공개질의 현상공모로 화제가 됐던 (주)가우디 사장 배삼준(47). 그러나 이 남자의 광고는 갈수록 끈질기다.

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우리 주변을 치고 나오는 그의 독특한 의견광고들. 오히려 영역까지 확장했다. 정치분야를 넘어 경제, 교육, 사회, 심지어 남북경협문제까지 넘나드는 그다. 그간 지면에 쏟아부은 돈만 수억원대. 누구보다 셈이 빠를 그가 도무지 이 ‘밑지는 장사’를 왜 하려드는 걸까?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그 누구라도 자기집 문이 뚫어져 바람이 들어오면 창호지라도 붙여 당장 바람을 막는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하지만 왜 집도 아닌 이 사회의 봉창까지 굳이 네가 막겠다고 나서냐고 말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나 스케일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물론, 이 일을 하다보니 덩달아 회사의 이미지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긴 있습디다. 하지만 그건 하다보니 생긴거지 그것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취급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일은 그저 다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제가 가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입니다.”

만약 인기를 노렸다면 진작에 소원성취한 그다. 대선후보 공개질의건으로도 이미 ‘대박’을 터뜨렸고, 올초만 해도 왕따해결방안 공모에다 훌륭한 선생님상 공모로 연이은 주목을 받은 그다. 2,000만원을 걸었던 왕따 해결방안 공모에선 워낙 시민들의 반응이 높아 마감기한을 보름이나 연장, 총 1,884명의 사례를 모아 각 교육관련기관에 제공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왕따문제의 답이 결국 학교안에 있었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상을 찾겠다고 다시 현상금을 내놓은 상태.


사회문제·북한문제에 ‘배삼준식 해법’등장

작년부터는 북한 기아난민 문제에도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 직접 곡식으로 원조하겠다며 곡물주식회사를 정식설립해 일을 벌이기도 했다. 러시아 연해주에 여의도 크기 30배의 농지 50만평을 임차, 대대적인 농사를 지은 것.

국가간의 환차를 이용해 그로 얻은 수익으로 지원하겠다는, 제법 현실성있는 구상이었지만 예상치못했던 러시아간 물자수송에 따른 법적 문제와 연해주 현지 기후로 인한 농사의 실패로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계획대로 추진될 경우 “물자수송을 연결고리로 판문점 문을 열겠다”던 그는 다시 계획을 수정, 최근엔 ‘북한농업물자채권’이라는 더욱더 배포 큰 사업을 구상중이다.

북한농업물자채권이란 3년 거치 5년 상환, 연리 10%를 조건으로 발행되는 북한 채권을 우리 국민들이 매입하는 아이디어. 이에 따라 조성되는 자금은 전액 국내 농업물자 생산업체에 발주, 씨앗과 농약, 비료 등의 농사기반물자를 지원해줌으로써 북한 스스로 식량문제를 풀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요즘 북한에선 ‘정주영식’과 ‘배삼준식’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정주영식은 한마디로 현대의 막강한 재력을 통해 돈으로 밀어붙이는 식이고 저는 또 다른거죠. 예를 들어 이 농업물자채권문제로 북한측 고위관계자들과 접촉할 때도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면 뭣보다 주민들에게 농토부터 나눠주고 일정량 수확외의 나머지는 자기몫으로 갖게 해서 의욕을 심어주라’고 요구했더니 그들 말로 ‘그 서류를 읽다가 벽에 기대지 않고선 서 있을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넘어질 정도로 놀랐다는거죠. 하긴 완전히 자본주의 식으로 바꾸라는 요구니 그럴밖에요. 말하자면 그런게 배삼준식이란건가 봅니다.”


회사경영도 청저한 ‘실용주의 노선’채택

그같은 ‘배삼준식’은 바깥에만 있는게 아니다. 업계에서도 별난 경영자로 소문난 그다. 신입사원 채용때도 난데없이 “3억2,750만원을 아라비아 숫자로 써보라”고 하거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관동별곡의 작자 등을 물어보기 예사. 결재때에도 대충 도장만 찍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결재상의 내용과 수치 등과 관련, 배사장이 기습적으로 퍼붓는 질문 때문에 사장실을 찾는 직원들은 항상 전쟁을 앞둔 병사처럼 긴장일색이다.

회사차량 자동차세 납부 문제로 서류를 들고 온 직원에게 자동차 배기량 단위당 자동차세 계산법까지 따져묻기도 하고, 결재를 받다 말고 관련 장부까지 요청하는 등 무서운 ‘청문회형’ 사장. 실수에 있어서도 가차없다. 배사장의 사전엔 경고나 훈방이라는 친절한 단어가 없다.

한번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일정기간 뒤 어떤 욕을 먹더라도 냉정하게 해고. 지난해 ‘실용주의’라는 제하로 낸 한 일간지의 의견광고에서 “노동법이 무서워 해고를 두려워말라”고 하던 말도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다. 현재 그의 회사에 남아있는 직원들은 그러한 배사장의 시험에 이미 무사통과했거나 혹은 그 과정을 거치고 있는 ‘특전사’들이나 다름없다.

“이 방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무서울겁니다. 하지만 뭔가 자기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알 겁니다. 어디서든 사물을 늘 예사로 넘겨보는 사람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늘 긴장을 잃지않고 앞서 위기를 내다볼줄 아는 사람만이 성공하는 겁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가르치기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듣기엔 좀 야박하겠지만, 직원들을 해고할 때도 제가 꼭 마지막에 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남들에게 자신이 여기에서 일했다고 하려면 해고됐다는 얘기를 꼭 밝히고, 해고됐다는 소리를 하기 싫으면 절대 내 밑에서 배웠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구요.”


값비싼 대가 치르며 이룩한 오늘

그도 가진 것 한푼없이 스스로 일어섰다. 52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7세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한달의 절반은 굶는 가난한 살림에 육성회비를 내지못해 초등학교만 4군데나 옮겨다녀야했다. 검정고시로 어렵게 들어간 경기공전 기계과도 2년만에 중퇴, 한참이나 지난 올해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것이 대학문턱을 드나든 처음이자 마지막 학력.

어린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털어놓기 꺼려질만큼 어둡고 힘겨운 것들 뿐이다. 곗돈 문제에 얽혀 난데없이 벌금 10만원을 물게되자 그 돈을 내지못해 직접 구치소로 향하던 어머니, 악취가 진동하는 정비공 숙소에 살던 언젠가 일하러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런 화재로 혼자 공포에 떨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불구덩이를 뚫고 뛰어나오던 기억 등. 고교졸업후엔 건축현장 막노동, 보험회사 영업사원, 외판원 생활 등도 전전했다.

75년 용케도 세무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겨우 안정된 자리를 찾는가 싶었지만 그것마저 적성과 맞지 않을뿐더러 ‘나보다 높은 자리가 너무 많아’ 80년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만큼 자립할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광고지 등을 인쇄하는 출판인쇄업도 해보고, 한동안 태능에서 음식점을 열었던 적도 있지만 줄줄이 실패였다. 원인은 경험부족. 해당분야의 전문지식없이 무작정 패기만 믿고 뛰어들었다가 그나마 공무원 생활로 모은 약간의 돈까지 모두 날리는, 값비싼 인생의 ‘기회비용’을 치렀다.

현재의 모피의류업은 바둑을 두던 중 우연히 모피업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처음엔 5만원을 주고 산 토끼털 코트, 여우털 목도리 장사로부터 출발해 차차 기반을 잡으면서 84년엔 분성물산을 설립, 88년엔 별도의 제작공장까지 갖추고 직접 무스탕을 만들어내는 등 확장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한 거래회사의 고의부도까지 당한 후인 91년 1억 5,000만원의 부도사태를 맞으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금도 금고안엔 당시 연중행사처럼 치르던 부도의 흔적, 휴지가 된 어음 40억원어치가 그대로 들어 있다.


필사적 가격거품빼기, 무스탕업계 선두주자로 발돋움

이 기업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준 것이 소매업으로의 전환. 모든 판매전략을 일시에 바꾸면서 회생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모피 한벌 가격이 평균 200만원대이던 것을 50만원대의 파격적인 가격으로 낮춘 것.

그 비결은 중간 유통과정을 완전히 없애면서 원단 구입에서부터 제조, 판매과정까지 20~30명의 몫을 혼자 뛰는 등 자신의 땀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값을 낮추려는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점포를 고르는 법도 남들과 반대로 갔다. 입점료가 비싼 백화점내 매장을 거의 철수, 점포를 얻는 이들이 가장 기피하는 허름하고 한산한 자리만 찾아다니며 가격의 거품을 빼는데 집중했다. 결국 모피업계 최초의 박리다매를 주도하면서 승부는 금새 판가름났다.

96년 연 매출액 400억원을 기록하는 등 무스탕업계의 선두주자로 부각, 지난해만해도 한 경제지가 선정한 ‘작지만 강한 50기업’중 하나로 뽑힐만큼 그의 기업은 탄탄하고 대외적 평가도 높다.

“그 사이에도 어려움 많았습니다. 뭣보다 처음엔 동종업계의 반발이 아주 심했죠. 혼자만 살려는거냐는 협박도 수시로 당했고, 매일 피신하다시피 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편법을 쓴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내가 내 몸으로 열심히 뛰어 값을 낮춘건데 당신도 그게 싫으면 당신이 직접 일해서 나보다 더 싸게 만들면 될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안에선 믿었던 사원에게 물건을 맡겼다가 불미스런 일을 당한적도 있고, 작은 감정 문제로 회사를 나간 뒤 악의로 투서를 해서 그 때문에 심하게 시달려보기도 했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 오죽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겠습니까. 완전히 미쳐서 빠지지 않고는 성공 못하는게 사업입니다. 저만 아니라 누구든, 사업해서 이익을 내는 사람은 트로이 전쟁 나가서 대승하고 온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됩니다.”


의견광고 문안짜기에 고심, 부인이 든든한 검열관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이젠 업무의 짐도 상당부분 덜어낸 상태. 웬만한 일은 직원들에게 맡기지만 여전히 광고만큼은 그의 몫이다. 아직 하고 싶은 광고의 10분의 1도 채 못 보여줬다는 배사장은 요즘도 거의 매월 한차례 의견광고를 싣느라 그 광고문안 싸움에 머릿속이 분주한 준 프로. 사실상 나름의 사전검열도 거치는 작품이다.

검열관은 다름아닌 그의 부인, 가난하고 볼품없던 청년시절 그를 택한 뒤 부모의 결혼반대에 부딪치자 스스로 집을 뛰쳐나온 순애보의 여주인공이다. 그래서인지 어떤지 밖에선 그토록 성깔있다는 그도 가정에 돌아가면 무골호인의 가장. 그중에서도 남편의 자화자찬에 누구보다 냉혹한 그녀의 사전인가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중요한 여과장치다.

처음 정치광고를 시작할 때는 “그 돈 있으면 직원들 봉급이나 더 주라”거나 ‘네가 뭔데!’식의 비아냥대는 익명의 전화도 받아보았고, 97 대선무렵엔 아예 형사들이 사무실에 진을 치고 있거나 북한기아문제에 나섰을 땐 안기부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총선출마까지 들먹이는 사람들까지 등장, “공연히 행동에 제약을 받기도 싫고 더 솔직히 말하면 당선될 자신도 없어 전혀 관심밖”이라 말해주는 배사장. 사업이 아니라도 할 일이 태산인데 최근엔 한국 신지식인연합 상임대표자리에까지 피선돼 평생 한가할 팔자는 되기 글렀다고 한숨이다. 과거엔 없어서 고생이더니 이제는 스스로 만들어 고생중,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가끔은 회의가 든다는 그는 그러나 답도 이미 오래전에 찾아 둔 듯 했다. 좀처럼 웃지않는 그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행복을 광고한다.

“어차피 대 재벌이 되지 못할 바엔 큰 돈을 벌겠다고 매달려 급하게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단지 제 방식, 제 힘 닿는대로 사회에 공헌하면서 하나하나 삶의 흔적을 만들어가는게 제 행복이지요.”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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