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고려말과 조선초의 은둔 선비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가 고려수도였던 개성을 둘러본뒤 비탄에 젖어 읊은 시조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옛 시인의 노래도 무색하게 변하는 것일까. 이미 20년전에 재계에서 사라졌던 ‘옛날 재벌’들이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다시 재기를 꿈꾸고 있다.

2000년에 재기를 노리는 ‘돌아온 재벌’은 3명이다.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율산의 신선호 회장, 강압적으로 연합철강의 경영권을 넘겨야 했던 권철현 회장과 아들 호성씨, 80년대 레저산업의 황제를 꿈꾸다 몰락했던 명성의 김철호 회장이 주인공들이다.


센트럴 시티에 재기의 꿈 실어

27세였던 1975년 율산실업을 창업해 불과 4년만에 14개 계열사를 보유,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통했던 신회장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호남고속버스터미널 부지에 짓고 있는 ‘센트럴 시티’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

율산이 남긴 ‘마지막 재산’인 ‘센트럴 시티’는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옆 3만5,000평의 부지에 들어설 지상 33층, 지하 5층 규모의 초대형 복합단지이다. 1991년부터 공사를 시작, 현재 85%의 공사가 진척중인데, 내년 3월 중순이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아케이드, 영 플라자 등이 문을 열게 된다.

특히 지상 8층부터 지하 4층에 들어서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매장만 1만평 규모로 강남 일대에서는 롯데 잠실점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하루 100만명을 넘나드는 이 지역 유동인구를 감안하면 롯데와 현대가 장악하고 있는 서울 강남상권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신회장은 하지만 철저히 ‘잠행’하고 있다. 요즘도 매일 사무실로 출근, 그와 동고동락한 ‘율산맨’들과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나 언론과의 접촉은 철저히 피하고 있다. 20년이상 그를 보좌해온 한 간부는 “센트럴시티를 계획대로 완공, 일류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신회장의 꿈”이라며 “2000년 3월쯤에는 언론에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보철강 인수로 철강업 재진출

연합철강의 창업자이면서도 1975년 경영권을 국제그룹(국제그룹 해체후에는 동국제강)에 넘겨주고, 2대주주의 위치에 머물고 있는 권철현-호성 부자는 한보철강 인수를 계기로 철강업으로의 재진출을 노리고 있다.

제일, 외환은행, 도이체방크 관계자들과 우방합동법무법인 변호사들로 구성된 한보매각 협상단은 1999년 12월11일 미국 뉴욕에서 한보철강을 미국 네이버스 컨소시엄에 5억달러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네이버스 컨소시엄은 네이버스 캐피탈, 서드 애비뉴 캐피탈, UNX캐피탈 등 3개사로 구성돼 있는데 UNX캐피탈 사장이 바로 권호성씨이다. 75년 권철현 회장이 최고위 권력자에게 밑보이는 바람에 연합철강의 경영권을 강제로 국제그룹에 넘겨주면서 쌓아왔던 ‘원한’을 아들인 권호성씨가 마침내 풀어준 것이다.

권호성씨의 한 측근은 한보철강을 통해 권철현-권호성 부자가 결국 철강업에 다시 진출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보철강 입찰에 참가한 미국계 자본은 5년후에 자본이득을 남기고 철수할 예정인데 이들이 매각하게 될 지분을 권회장 부자가 인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저사업 추진에 남은 인생 바쳐

1980년대 초반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급부상하다가 1983년 금융스캔들로 무너진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역시 다방면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김회장은 1995년 12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석방되자마자 “강원도 태백에 대단위 위락시설을 건설하겠다”고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고 지난해 5월에는 “일본의 재일교포 자금을 유치, 대한생명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의욕을 보여왔다.

김회장은 또 1999년 3월 강릉 칠성산 태권도 수련장의 건립을 조건으로, 1억 달러 규모의 외자를 유치해 일대를 세계적 관광명소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역시 1999년 3월에는 시화방조제 앞 서해상에 대규모 수상호텔을 짓겠다는 내용의 사업계획서를 경기도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잇달아 ‘컴 백’을 선언하고 있는 ‘왕년의 재벌’들이 재기를 하게 된 이유는 뭘까. 빈털털이가 되기는 했지만 또다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것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까. 씁쓸하게도 이들이 재기의 날개짓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처럼 많은 재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각각 중후사업 회장이자 사장인 권철현씨와 권호성씨 부자. 권철현 회장 일가의 경우 75년 연합철강의 경영권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부산과 서울 등지에 수천억원대의 건물과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재산가이다.

실제로 90년대 초에는 권철현씨의 부인인 김순자씨가 국세청이 발표한 ‘전국에서 부동산을 가장 많인 보유한 5명’에 뽑히기도 했다. 권회장의 한 측근은 “권회장의 경우 부동산 임대를 통해서만 연간 수십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남겨진 재산 든든, 운 따라 주기도

초대형 복합단지를 건설하고 있는 신선호 회장 역시 ‘실력’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불과 5년 동안 금융기관에서 2조3,000억원이란 거액을 빌린뒤, 돈을 갚지 못해 몰락했던 신회장에게도 숨겨논 재산이 있었던 것이다.

신회장은 1970년대 중반 서울시로부터 현재 ‘센트럴 시티’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터미널부지를 평당 7만원의 헐값으로 넘겨받는다. 고속터미널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서울시가 불하한 것인데, 1980년 4월3일 신회장이 19억원의 공금횡령, 외화도피, 은행직원들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되면서 율산으로의 소유권 등기가 제때에 이뤄지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신회장에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채권은행인 서울신탁은행의 채권회수 대상에서 ‘터미널 부지’가 빠지게 된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 ‘무서운 아이’였던 신선호 회장의 재기는 그의 ‘무서운 실력’보다는 ‘억세게 좋은 운수’때문인 셈이다.

1983년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김동겸 대리와 짜고 희대의 금융스캔들을 일으켰던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은 1995년 출옥이후 잇따라 발표한 주요 사업계획 대부분이 제대로 착수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사업추진의 핵심요건인 자금 동원력에서도 의문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