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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한국 최고의 아이디어왕 금호그룹 윤생진 상무

‘흑산도 물개’의 행진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금호그룹 아이디어왕 윤생진(49)이 또한번 속도위반을 저질렀다. 고졸 출신의 생산직 사원으로 출발, 그간에도 연이은 초고속승진으로 시선을 모았던 그가 급기야 1월 1일 상무이사로 파격승진, 또 한번 인사파괴 기록을 갱신했다. 부장직에 오른지 2년만의 일이다. 이번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의 소감이 복잡하다.

“얼떨떨하고 두렵습니다. 능력면에선 단 한번도 누구에게 뒤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줄까 솔직히 회의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에 대한 기대치가 이렇게까지 크구나 새삼 놀랍고, 한편으론 저같이 낮은 학력, 어려운 환경의 근로자들에게 중요한 시범 케이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잘해야겠다는 압박감이 큽니다. 그런 부담 때문에 더욱 두렵고 얼떨떨합니다.”


생산직 근무시절 매년2,000건의 아니디어 쏟아내

기업인들 사이에선 전설적인 아이디어맨. 생산직 근무시절 매년 2,000여회의 아이디어를 폭포처럼 쏟아내며 국내 최고의 제안왕 자리를 석권한 그다. 품질이나 불량률, 생산성 문제 등 각 분야를 막론하고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내밀며 회사에 직·간접적인 이익을 불러다 준 일등공신. 대표적인 것이 1985년 일본에서 제작한 타이어 완제품 제조기의 작동순서를 바꾼 케이스.

이로인해 제작시간이 타이어 1본당 10초씩 단축되면서 연간 2만본의 타이어 추가생산이 가능, 연 18억원의 돈을 회사에 벌어주었다. 지금도 동종업계의 제안모델로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히트작이기도 하다. 1984년에도 역시 한 마무리 작업라인의 공정을 일부 변경함으로써 가동률을 15% 높였다. 그외에도 구내식당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분리 반납하는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연간 30억원의 설거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는 등 곳곳에서 수훈을 세웠다.

상 복, 승진 복도 억세게 좋은 사나이. 생산직 사원에서 반장, 주임, 대리, 차장 등 특진만 7차례를 거쳐 상무직에 올랐고, 표창경력만해도 1983년 석탄산업훈장을 수여한 것을 비롯해 대통령표창 3회, 회장표창 1회, 사장표창 52회에 이르는 등 사내외를 통틀어 총 90회에 이르는,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각종 상을 휩쓸다 못해 1990년부터는 아예 후배들에게 양보하겠다며 더 이상의 표창을 사양한 상태. 그런 그를 위해 회사에서는 몇해전 그의 첫 근무지인 타이어공장에 기념목과 기념비까지 따로 세워 눈길을 끌었다.


타이어공장서 사회생활시작, 제안왕‘고공비행’


51년 흑산도에서 태어난 그는 별명도 ‘흑산도 물개’다. 도무지 일에 지칠줄 모른다는 뜻으로 동료들이 붙인 이름이다. 흑산도에서 자라면서 그는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어머니로부터 듣던 말이 있다. “너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없으니 이 세상을 살려면 비위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부였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뒤 워낙 막막한 살림에 고등학교도 간신히 마쳤다.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다. 전체 40명중 평균 석차 30등. 어린시절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다거나 그러한 그를 두고 이상하게도 주변 어른들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커서 큰 일을 할 녀석”이라고 말하던 기억이 고작이다.

면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 군대를 다녀온 뒤 78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 입사했다. 사원이라곤 하지만 종일 하는 일이 등을 구부리고 앉아 타이어 고무를 붙이고 잘라내는 것이 전부이다시피했다. 그러다 사내 제안제도를 접하게 됐고 그저 한번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아이디어를 낸 것이 그의 생애 첫 당선작이 됐다. 그것은 부서내 안내표지판에다 화살표 꼬리를 그려붙이는 것.

그 부상으로 당시의 고가품인 전기난로를 받았는데, 그것을 애인에게 보여주자 갑자기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인정을 받는’ 쾌감이었다. 애인의 칭찬을 듣기위해 더욱더 기를 쓰고 제안에 몰두했던 그는 제안과 당선의 횟수가 늘면서 자신을 보는 상사의 눈빛도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엔 상금이나 부상보다도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에 더 더욱 열성을 보였다. 과(課) 1등에서 부(部) 1등, 회사 1등으로 목표치도 점점 높아졌고 1984년 사내제안왕을 차지한 뒤엔 1988년 전국제안왕, 1994년 품질명장, 1995년 국제품질대회 한국대표로 뽑힐만큼 어느새 ‘거물’이 되었다.

이를 위해 쏟아부은 노력들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입사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하루 평균 4시간 이상 자 본적이 없다. 근무시간은 근무시간대로 일하면서도 종일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것은 제안 궁리뿐이었다. 작업중에도 생각나는 것들이 있으면 얼른 메모해두었다가 퇴근후 그 메모지를 다시 펴들고 밤새 전문서들을 뒤지며 공부해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생산직공 시절에도 그의 호주머니엔 항상 회사연구소에서 빌린 공정이론이니 타이어기초이론이니 하는 어려운 책들이 들어있었고, 때로 영어로 된 원서는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아는 연구소직원에게 술을 사주면서까지 기어코 번역을 부탁해 읽었다. 1분 1초도 아까왔다. 출퇴근 시간 30분을 벌기위해 중고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다.행여 지나가는 생각을 놓칠세라 온 호주머니며 책상, 가방, 거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메모지를 늘어놓는 것도 모자라 나중엔 잠자리 머리맡에 녹음기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7년간 제안 1만8,000여건이라는 경이적인 기록과 한국 최고의 아이디어왕 유생진의 이름은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저놈때문에 피곤해서 못살겠다”사방에서 따돌림

고난도 많았다. 너무 잘 나가는 것도 때론 복이 아닌 화였다. 특히 1983년부터 1988년까지는 장안의 각종 상이란 상은 혼자 독점하다시피 한 그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중 1987년 어느날 노조로부터 느닷없이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과 기대를 받고 있던 그가 ‘어용’으로 몰린 것이다. 입사때부터 간직해 온 꿈, 부장이 되겠다는 희망은 고사하고 당장 생계문제마저 위태로와진, 너무도 아찔한 위기였다.

“뭣보다 저 놈(윤생진)때문에 피곤해서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제가 자꾸 아이디어를 내놓는 바람에 귀찮은 일이 많다는거예요. 또 제가 반장을 맡았을 때도 우리반은 무조건 불량률이 떨어져 언제나 1등을 독차지 했어요. 그런데 이것도 능력제로 봉급을 받을 때라 자연히 우리반원들 봉급이 늘 다른 반보다 더 많거든요. 그들에겐 눈엣 가시였죠. 똑같이 따라잡자니 저만큼 열심히 일하는 건 너무 귀찮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공연히 화가 나고. 그런 저런 일들이 누적되다가 결국 강성 노조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절 쫓아내자는 이야기가 나온거지요.

정말 하늘이 캄캄했습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어 어느날 조용히 그들을 찾아가 차근차근 설득했습니다. ‘난 어용도 아니고 회장 밀대도 아니다. 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학도 못 나온게 늘 한에 맺힌 사람이다. 내 꿈이라곤 오로지 이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내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 뿐이다. 제발 나를 이해하고 도와달라’구요. 완전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중엔 저를 이해해주더라구요.”

따돌림 아닌 따돌림도 당해보았다. 생산현장에서 갑자기 회장부속실로 승진발령나던 날,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가 가시방석이었다. ‘함량미달’의 학력과 경력으로 최고 엘리트집단까지 들어온 그를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향해 꽂히던 일부 동료의 차가운 시선. 부서내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자리 끝엔 그들의 한마디 조롱이 따라붙었다.

‘당신 부속실와서 잘 될 것 같냐? 언제 다시 내려가게 되는지 한번 보자.’ 그럴 땐 넉살 좋기로 소문난 그도 참지 못해 혼자 남산에 올라가 목청껏 노래 10곡씩 불러대며 울다 내려왔다. 그 가운데 또다른 힘이 되어준건 그외 말없이 그를 감싸주던 대다수 부속실 동료들이었다.

“만약 그때 다른 동료들이 절 그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국 저는 더 버티지 못하고 광주로 내려갔을 겁니다. 생각할수록 동료들에겐 항상 고마운 마음 뿐이죠.”


“주위도움없이 혼자서는 성공할수 없는 일”

익명의 투서사건을 겪기도 했다. 2계급 특진으로 승진되던 해, 누군가 회사측에 이름없는 투서를 보내 ‘그가 너무 설친다’며 음해를 한 것이었다. 한편에선 그가 회장 측근이라는 소문까지 떠돌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찍히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회장님과 가까워진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생산직 사원 때부터 워낙 날이면 날마다 제안상을 받으러 나가다보니 자주 얼굴이 마주쳐 회장님이 저를 눈여겨보시게 된 겁니다. 아무튼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제가 배운건 실력만 있다고 누구나 성공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성공의 80%는 인간관계에 달렸습니다.

누군가 앞서가는 사람이 있으면 공연히 못마땅해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어하는게 인간이며, 게중엔 상대의 급소를 찾기위해 집요하게 매달리는 비정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신이 더 중요한 겁니다. 주위의 도움없이 절대 혼자 성공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가 성공했다는 것도 결국엔 그런 의미다. 대외적으론 아무리 ‘나 잘난’ 박사라도 그럴수록 엎드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실제로 일상생활속의 그부터가 철저히 수그리고 굽힌다. 사소하게는 고스톱을 치더라도 줄 돈은 철저히 주고, 받을 건 적게 받는다. 술값도 가능하면 먼저 내고, 인사도 99%는 유씨쪽에서 시작한다. 조그만 실수에도 부하앞이든 상관앞이든 미안하다는 말을 주저없이 꺼낸다. 업무상 책임을 묻는 자리가 있어도 “일부는 내 잘못”이라며 앞서 자진포복. 그래야 만사가 편하고 또 그것이 세상사는 이치라고 유생진은 생각한다.

“물론 때로는 너무 무른 사람으로 오해를 받거나 얕보일 때도 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먼저 수그림으로써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훨씬 많아요. 특히 뭔가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면 그럴수록 더 남들에게 양보하고 희생하는 방법밖에 길이 없지요.일부러라도 뭔가 틈을 보여주고 부족한 척 하는 것이 결국은 소리없이 이기는 길입니다.”


외국의 경영이론서 우리환경에 맞게 옮기는중

중간관리자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22년에 걸쳐 배인 공부습관. 요즘도 매일같이 출퇴근 전후 하루 4시간은 꼬박 전문서적을 읽는데 보내고, 한달 평균 책 너댓권은 기본으로 독파하는 공부벌레다.

주말인 토,일요일이면 아예 인근 고시원에 틀어박혀 책을 쓴다는 그는 현재 다섯번째 저서를 집필중. 이름하여 ‘생진경영학’이다. 새롭게 나아간다는 뜻의 그의 이름 그대로 외국의 유수 경영이론들을 한국의 토종환경에 맞춰 만든 그의 새 작품이다.

뒤늦으나마 1996년 45세 만학도로 회사가 서울대에 의뢰한 금호MBA 6개월 과장을 수료, 못배운 한도 풀어낸 그다. 무리한 공부에 몸이 축나 오래전부터 보약까지 지어먹는 처지지만, ‘나는 자전거와 같아 평생 쉬지않고 페달을 밟아야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라며 도무지 쉴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퇴직한 후 언젠가는 청소년 수련원을 열어 패기있고 강한 젊은이들을 직접 길러볼 욕심도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누가 뭐래도 회사의 녹을 받는 직원이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배경 대신 능력을 선택해준 ‘금호교’의 골수신도로 평생을 바치기로 했다. 그가 이곳에서 터득한 인생의 비밀은 의외로 단순하다. ‘뭐든 이 악물고 덤비는 놈이 반드시 이기는 게 이 세상이더라’는 것. 어떤 길이든, 얼마나 남았든 끝까지 덤비는 놈 말이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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