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13총선에서도 최소 1조원 이상의 선거자금이 뿌려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각 당 관계자들이 말하는 과거 총선 경험으로 추산된 액수다. 후보 1인당 평균 7억원을 쓴다고 가정할 때 출마 예상자 1,500명이 뿌리는 총액은 9,000억원. 여기다 중앙당의 조직활동비, 홍보비, 인건비 등으로 나갈 약 1,000억원을 합한 금액이다.

지난 15대 총선 뒤 출마자들이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선거비용은 평균 4,625만원. 삼척동자도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별 문제가 없이 지나갔다. 왜일까. 거짓말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거짓말해도 제지할 세력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도도 문제지만 비판하는 의식도 문제였다.

천문학적인 총선자금이 도대체 어디로 흘러 갔을까. 대부분이 매표(買票)를 위해 쓰여졌을 게 뻔하다. 각급 조직책이 절반 이상을 챙긴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더라도 상당수는 ‘푼돈’의 형태로 유권자들의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불법자금을 안받고, 오히려 주는 사람을 고발하면 후보들이 헛돈을 쓸 이유가 없다. 유권자들이 정치판 혼탁의 책임 일부분을 떠맡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한 국가의 정치수준은 국민의식 수준을 반영한다’는 말이 성립하고, 또 애용된다.



낙선운동은 시민들의 정당 민주화 요구

하지만 유권자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금권, 지연, 학연선거가 횡행할 수 밖에 없는 정치판의 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정당운영의 비민주성. 정당운영의 비민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공천제도다. 후보를 정당 수뇌부가 결정하는 현재의 관행은 민주적 절차와는 거리가 멀다. 정당정치가 자리잡힌 선진국에서 위로부터 결정되는 공천관행은 찾아 볼 수 없다.

밀실공천은 유권자의 선택을 제한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지만 어쩔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다. 연세대 박상기 교수(법학)는 이번 낙선운동을 정당 운영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적 의사표시로 보고 있다. 시민들이 정당의 자체 개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대신 밖에서 개혁을 종용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비민주적 정당운영은 국회의원들의 자질 저하를 초래한다. 의정활동을 안해도 되는 풍토가 형성되는 것이다. 경실련이 발표한 공천부적격자 명단에 본회의 출석률 저조 의원들이 다수 포함된 것은 이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경희대 임성호 교수(정치학)는 의정활동 성적이야 말로 의회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척도라고 말한다.

미국 의회는 상시개원 체제를 갖고 있다. 상하원 의원들은 매일 열리는 소위원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한다. 의원들이 의정활동 이외에 개인사업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의원들의 휴가는 성탄절 전후 2주일, 연초의 2~3주가 고작이다. 주말을 이용한 지역구 관리를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거의 의사당에서 보낸다. 의정활동으로 자질을 심판받는 만큼 전문가가 대접받게 마련이다.



개혁 주체인 정치권이 개혁의 대상으로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지역구 관리가 우선이고 국회출석은 뒷전이다. 당 실세가 외유를 떠날 때면 줄줄이 공항으로 배웅나가 의사당은 텅비기 일쑤다. 보스가 정당을 쥐락펴락하는 행태는 정치를 더욱 꼴사납게 만든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정치학)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보스정치와 지역주의가 판을 치면서 정치가 폐쇄적인 독점체제로 변했다는 것이다. 손교수는 이 때문에 개혁의 주체인 정치권이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했다고 진단한다.

경실련 시민입법국의 김영재 간사는 정치현실을 국민의식 수준으로 돌리는데 반대한다. 견고한 독점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정치권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국민의 개혁 의지를 꺾어 왔다는 주장이다. 그는 여야가 정치개혁법안들을 놓고 이해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단적인 예로 든다. 그는 정치개혁의 책임을 국민과 유권자들이 회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들이 정치권에 충격을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양자를 연결시킬 통로가 필요하다. 중립적인 여론 선도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각종 시민단체들이 선도세력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단체들이 정치적 중립성을 제고하고, 아울러 이들의 여론 선도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최종욱 사진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