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 전독일총리, 비자금 스캔들로 몰락 위기

키 190㎝, 몸무게 100㎏이상의 거구인 헬무트 콜(69) 전 독일 총리는 풍체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거인이었다. 1998년 9월 총선 패배 때까지 무려 16년간 총리를 지낸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통일의 영웅’이다. 거인은 그림자도 큰 법인가. 독일은 지금 이 거인이 남긴 그림자를 지우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최근 독일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이른바 ‘비자금 스캔들’은 콜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25년간 이끈 기민당(CDU), 나아가 정치권 전반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번지고 있다. “모든 잘못은 콜에게 있다. 나는 깨끗하다”고 버티던 ‘콜의 후계자’볼프강 쇼이블레 기민당 당수 마저 불법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는가 하면, 여당인 사민당(SPD)과 녹색당도 일부 간부들이 뇌물성 편의 제공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로선 그 추락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군수업체로부터 리베이트 수수 밝혀져

이번 스캔들은 지난해 11월초 아우크스부르크 검찰이 정치헌금 횡령혐의로 기민당의 회계 담당자들을 체포하면서 촉발됐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기민당이 1991년 군수업체 티센으로부터 100만 마르크(약 6억원)를 받아 비밀계좌에 넣어두고 관리해온 사실을 밝혀냈다.

티센은 기부금을 낸 대가로 연방안보이사회의 공격무기 제3국 판매금지 결정을 어겨가며 사우디아라비아에 36대의 탱크를 판매했다. 그런데 연방안보이사회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연방 총리이자 이사회 의장인 헬무트 콜 밖에 없었다.

콜은 처음에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하지만 관련 증언과 문건이 쏟아지자 지난해 11월30일 “1990년대에 받은 돈은 총 200만 마르크”라고 시인하면서도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통일과정에 쓴 통치자금’”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발언은 그동안 꼬리를 문 의혹에도 불구하고 “비밀계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부정해 온 콜의 말을 믿고 싶었던 기민당원들과 국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안겨줬다.

하지만 거인 콜은 ‘큰 정치인’은 아니었다. 콜의 변명이 거짓으로 드러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민당 지도부는 12월말 콜이 1990년대에 받은 200만 마르크 가운데 10만 마르크를 자신의 고향인 루드비히샤펜 지역에 썼다고 스스로 공개했다. 정치자금의 대부분을 선거 득표수에 따른 국가보조금으로 메워주는 대신 정당회계를 공인 회계감사를 거쳐 공개토록하는 독일의 현행 정치자금법을 만든 장본인이 콜. 콜 스스로가 이 법을 어긴 것이다.


비자금 조성의혹ㆍ배임혐의로 검찰조사

콜 스캔들은 정당법에 따른 정치자금 보고의무 뿐 아니라 ‘콜 시스템’이라는 1인정치의 비민주성을 함께 드러냈다. 콜은 검은 계좌를 통해 돈을 착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의회 청문회 출석을 앞두고 있는 콜은 요즘 비자금 조성의혹과 배임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당내에서 조차 조기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콜은 이제 정치 생명을 건사하기는 커녕 철창신세 마저 각오해야 할 처지다.

2000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비자금 의혹은 콜의 오른팔인 쇼이블레 당수의 비리로 확대됐다. 차기 총리를 노리던 쇼이블레 역시 1994년 티센의 무기중개상으로부터 10만마르크를 받은 사실이 폭로됐고 사실로 드러났다. 그도 콜 처럼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으나 지난 10일 돈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당자금 담당자가 장부에 누락시키는 실수를 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의 변명도 콜 처럼 거짓으로 드러났다. 디 벨트지는 15일 기민당 간부의 말을 인용, 쇼이블레가 1997년 스캔들을 우려한 나머지 회계장부를 조작하도록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100만 마르크에서 출발한 기민당의 비자금은 눈덩이 처럼 늘어났다. 헤센주 기민당 책임자는 80년대에 1,300만 마르크가 스위스 비밀계좌를 통해 당에 유입됐다고 폭로했고, 프랑스 기업에 구 동독의 정유회사를 넘겨준 대가로 수천만달러를 받은 의혹이 프랑스 언론에 보도됐다.


기민당, 창당이래 최대위기

1945년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기민당은 하루가 멀게 추문이 확산되자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특히 지난 25년간 콜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기민당 지도부 누구도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위기에서 당을 구할 인물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독일 언론들은 2차대전 후 이탈리아 정치를 이끌어온 이탈리아 기민당이 1990년대 초반에 총체적인 부패로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것과 같이 독일 기민당도 이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해체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에 ‘콜 파동’은 집권연정인 사민당과 녹색당에 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최신호에서 녹색당이 지난 7년간 당내 소속 의원들의 세비에서 350만 마르크(약 21억원)를 거둬 당자금으로 전용했다고 폭로하고 이는 원내 자금의 정당자금 전용을 금지하는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디 벨트지도 11일 사민당이 잡고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관리들이 지난 14년간 관내 기업의 전세기를 사적인 여행에 이용했다는 이른바 ‘비행기 스캔들’을 제기했다.


검은 그림자에 묻힌 정치적 업적

하지만 여당은 ‘콜의 그림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깨끗한 편인지 반대 급부에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기민당은 지지율이 전달보다 8% 감소한 38%를 기록한데 반해 사민당은 7% 상승한 40%를 나타냈다. 사민당은 15일 콜, 쇼이블레 등 기민당 지도부 대부분이 포함된 26명의 명단을 의회 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자로 발표하는 등 인신공격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제 막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콜의 검은 계좌들은 이미 197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운영돼 온 것이다.

그러나 누가 얼마를 어느 계좌에 지불했는지, 들어온 자금이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 등 핵심적 의문들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독일 검찰과 국민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거인 콜의 몰락은 아무리 큰 정치적 업적도 자신의 그림자에 송두리채 묻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다.

국제부·이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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