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은 왜 쓰는가. 적어도 YS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우리나라 정치인으로 자신이 ‘최초의 기록’을 가장 많이 가진 이로 ‘최초’를 계속 지니고 싶은 개인적 소원 때문이었다. 크게는 그의 1998년 2월 퇴임후 느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에 바친 그의 투쟁을 후세에도 전하고 싶은 애국심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공인으로서의 의무는 새천년, 새해 1월20일 ‘김영삼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 되어 3권의 책으로 나왔다. 1927년 태어나 199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까지의 이야기가 실렸다.

윌리엄 글라이스턴은 1978년 6월부터 81년7월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그는 세기말인 1999년 12월15일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는 회고록을 책으로 냈다. 이 회고록에는 1979년 6월30일 카터와 박정희 정상회담, 10·26,

12·12, 5·17, 5·18, 전두환소장이 대장이 되고 두번이나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기록돼있다.

글라이스턴은 적어도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중 격동기 였던 때에 미국의 대한정책의 진솔한 면을 쓰고 싶다는 개인적 소원을 이 회고록에 담고 있다. 크게는 미국의 대한 정책이 “80년대 한국의 정치발전과 인권상황 개선면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놀랄만한 민주발전에 가장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는 결론을 얻기 위한 것이다.

두 회고록은 1978~1981년의 격동기 한국의 민주주의 실상에 대한 협의(狹意)건 광의(廣意)건간에 회고며 성찰이다. 다만 시각에서 한사람은 한국인이요 한사람은 미국인이라는 점이 다르다. YS는 “이 시기는 민주주의를 해야만 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더 빨리 온다”고 주장하고있다.

글라이스턴은 그때의 민주주의를 ‘민주발전’이라 표현하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유지라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이 민주인사면 되지”하는 ‘간섭’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관찰에 머물고 있다.

회고록이 어느 시기의 역사상황을 다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 이를 쓰는 사람은 객관성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객관성이 증명되는 것은 결국 역사에 다시 넘겨지기 일쑤다.

두 회고록에는 ‘격동의 시기’에 두사람이 서로 적어도 다섯차례 이상을 만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두사람 모두 박정희 전대통령이나 전두환 전대통령을 ‘독재자’로 표현한 것은 같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미국과 미군의 역할에 대한 관점은 사뭇 다르다. 두 회고록을 통해 몇 장면을 본다.

1979년 5월30일, YS는 두번째로 신민당의 총재가 된다.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목아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가 당선 소감이었다.

YS는 ‘박정희’(박대통령이라 기술안함)에 대한 강력 대응 자세에 나섰다. 6월30일 국회 특별실에서 가진 방한한 카터와의 회담에는 글라이스턴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이 배석했다. YS는 ‘박정희’에 대한 시위라도 하이 카터에게 말했다.

“당신이 밤낮, 인권, 인권하고 주장하는데 한국에 무슨 인권이 있느냐. 박정희는 지금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소리없이 감옥에 집어넣고 있는데 그런 독재자를 당신이 돕는것은 도대체 뭐냐. 그게 인권을 내세우는 당신이 할일인가.”(김영삼 회고록 2권)

전날 청와대 국빈 만찬에 불참한 YS는 카터와의 회담이 박대통령과의 회담만큼 길어야 한다고 우겼지만 이 회담에 만족해 했다고 글라이스턴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다만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론과 인권론을 강요하는 것은 동아시아 부차관보를 두번 지낸 그에게는 미국의 이익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박 대통령이 1960년 초기의 대통령이 아니며 미국은 베트남의 실패로 동아시아에서 우방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선지 그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국회내외에서 눈에 띄는 강경노선을 펄쳤다. 거기에는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에게 야당 지도자 자리를 넘겨주지 안않겠다는 결의도 작용했다”고 쓰고 있다.

이런 글라이스턴은 1979년 10월4일 김영삼 신민당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자 ‘현안협의’라는 명목으로 소환된다. YS는 9월16일자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분통을 터트렸었다.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미국 대사관은 그들의 시야와 접촉을 확대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대사관이 방대한 인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접촉의 범위가 그렇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박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억지이론이다.”

YS의 ‘박정희’에 대한 포문은 미국과 한국에서의 그나라 대표인 글라이스턴에 대한 비판으로 향했다. 결국 역사는 ‘10·26 그밤’을 향해 갔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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