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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과 정치개혁] 혼쭐 난 의원님들, 정치권 '회개' 할까

시민단체 대대적 공세, 백기항복 더 두고봐야

“잘 알잖아,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지.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고,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이를 이용하고…이게 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는 것을.”

잘아는 식당부부의 열일곱살 딸에게 임신시키고 전속 미용사와 염문을 뿌리면서도 유권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말솜씨와 대의명분으로 인기를 끌어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과정을 묘사해 화제를 뿌렸던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 ‘프라이머리 컬러스’의 한 대사이다.

겉다르고 속다른 정치인의 두 얼굴은 동서를 막론한 공통적인 특징일지 모른다. 비록 영화라지만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이 이 정도라면 한국의 정치 현실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겉다르고 속다른 한국의 정치인들이 새천년 들어 헌정 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난을 겪고 있다.


시민의 힘에 두손 든 정치권

16대 총선을 불과 3개월 앞둔 1월10일 경실련이 전격적으로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한데 이어 24일 참여연대 등 400여개 시민단체들이 연합한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비리와 지역감정에 편승하면서도 기고만장했던 정치인들에게 사실상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이름이 거론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권 전체가 불과 20여일 사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저항다운 저항 한차례 하지 못하고 코너로 몰렸지만 이를 지켜보는 많은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고 정치권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사실상 두손을 들고 말았다. ‘반칙’이라고 소리질러 봐야 동정의 손길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여야가 1년8개월 동안 이해득실을 면밀히 계산한 끝에 겨우 타협점을 찾아 1월15일 내놓은 선거법 개정안은 ‘나눠먹기식 개악’이라는 여론의 질타에 원천무효가 되고 말았다. 여·야는 대한변협과 시민단체, 언론계, 학계인사들과 함께 선거구획정을 다시 시작했다.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선거법의 선거운동관련 규정도 손질키로 했고, 명단도 공천심사에서 참조하겠다고 밝혔다. 선거기간에는 국가와 국민타령을 하면서도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던 정치권이 혼찌검이 난 셈이다.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총선시민연대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참여연대 상임사무처장)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을 “마치 1987년 직선제 개헌 등을 위해 구성된 국민운동본부 시절이 생각날 정도”라고 말했다.


병무비리의혹도 태풍의 눈으로

정치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낙천·낙선운동 뿐이 아니다.

반부패 국민연대가 현역 국회의원 21명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의 병무비리의혹 대상자 명단과 금품수수내역 등을 청와대에 넘겨줌으로써 정치권에 또 한차례 회오리가 불어닥칠 전망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에서“병무비리는 뿌리를 뽑겠다”고 공언해 대충 넘어가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병무비리는 국민감정상 예민한 사안이어서 정치인들이 압력을 행사해 국방부의 조사를 무마하거나 중지시킨 사실이 확인될 경우 사회적 파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선거법 위반과 각종 비리혐의로 기소됐지만 ‘의정활동’을 이유로 재판에 상습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이른바 중진 정치인들의 행태가 다시 한번 부각되는 등 정치권으로서는 악재가 겹치고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압력에 밀려 과연 우리 정치인들이 백기항복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전문가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유보한채 “지켜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병무비리와 기소정치인재판은 각각 검찰과 법원의 처리방침이 변수지만 시민단체의 압력으로 현재 정치권이 재논의에 들어간 선거구획정문제와 시민단체가 발표한 낙천대상자에 대한 공천여부, 단체의 선거운동 등을 금지한 선거법조항 등이 어떤 식으로 바꾸어지느냐가 관심사다.

여·야 간사 3명과 민간인 4명 등 7명으로 구성된 선거구획정위는 24일부터 선거구 조정에 착수했지만 여론이 요구하는 의원정수 축소문제는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각 당의 지도부가 간사들에게 정원축소권한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활동시한도 27일까지로 촉박해 민간인들과 정치인들의 의견이 엇갈릴 경우 파행만 거듭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여야 지도부가 파행의 책임이 전적으로 정치권으로 쏠릴 것이 뻔하다는 상황인식을 하고 정원축소숫자를 가능한 줄이는 선에서 극적인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도 있다.


지역감정해소 등 고질적문제는 여전

시민단체가 발표한 낙천대상자에게 각당이 공천을 하느냐도 관심이다. 각당은 시민단체가 제시한 낙천대상자명단을 공천심사에서 참고하겠다고 밝혔지만 민주당 박상천 원내총무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 박준규 국회의장 등 여·야 실세의원들이 대거 포함돼 있어 몇몇 힘없는 의원들만 공천에서 제외될 경우 논란이 예상된다. 또 정치생명에 사실상 끊어질 위기에 놓인 낙천대상 의원들이 시민단체를 상대로 소송을 벌일 가능성도 있어 후유증을 남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선거법 87조의 개폐는 상대적으로 쉽게 타협점을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당이 전면폐지를 주장하는 반면 야당과 중앙선관위는 유사·관변단체의 선거운동개입을 막을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은 사실상 합법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시민단체 등에서 정치개혁의 핵심적인 요소로 지적했던 정치자금의 투명화 방안과 국고보조금, 선거사범 공소시효 조항 등은 아예 관심대상에서 벗어났다. 정치권은 총선까지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정치개혁문제를 재론하는데 난색을 표하면서 여론의 이슈가 선거구획정과 선거법87조 개정 등에서 벗어날까 우려하는 표정이다.

결국 이번 총선에서는 시민단체들의 압력으로 정치권의 인적 청산작업이 어느 정도 이뤄질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지역감정해소 등 우리나라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소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 관계자도 “이번 운동으로 수십년간 고착화한 정치권의 문제점이 모두 사라지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며 “유권자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면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80여일 앞으로 다가온 4월13일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힘을 확인하고 16대 국회에서 제도개혁을 추진하도록 촉구하는 과제가 남은 것이다.

송용회·주간한국부 기자 songy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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