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동차업체, 한국진출에 안간힘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유행했던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구호가 12년만에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달라진 것은 12년전에는 올림픽이 열렸던 잠실운동장에서 울려 퍼졌던 이 구호가 이번에는 사활의 기로에 몰린 한국 자동차 업계에서 터져나오고 있다는 점뿐이다.

한국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뒤 헐값으로 국제 입찰시장에 내몰린 대우자동차와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르노(Renault)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체들이 서울로 몰려들고 있다. ‘처녀시장’이나 다름없는 한국 시장을 발판삼아 아시아 자동차시장 진출을 노리는 외국업체들의 치열한 인수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우자동차, 외국업체들 인수경쟁

우선 18조6,000억원이라는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는 대우자동차. 대우자동차의 경우 한때 현대자동차가 ‘한국 자동차 시장의 존립’을 근거로 해외매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이미 해외매각이 ‘대세’로 굳어진 상태이다. 실제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시절부터 대우자동차 매각을 주도한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은 1월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GM이나 포드 등으로의 해외 매각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날 “우리끼리 똘똘뭉쳐 잘해보자고 해서 정작 국제경쟁에서 진다면 심각한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400만대의 생산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포드에 비해 인수협상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GM은 채권단에 배타적 협상권을 요구하고 있다. GM은 대우차 국내공장과 해외공장의 90% 이상을 인수하고 부채 18조6,000억원의 30%를 책임지겠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당초 단독입찰을 예상했던 GM은 인수가격을 끌어내리기 위해 ‘시간끌기 작전’을 펼칠 작정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포드가 인수경쟁에 뛰어들어 협상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후발주자인 포드 역시 나름대로 적극적인 협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포드의 폴 드렌코 아시아·태평양 담당 이사등 3명의 협상단은 지난 1월6일 산업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포드측은 “국내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여할 것이며, 대우차를 인수할 경우 협력업체와의 거래지속은 물론 고용문제도 한국 정부나 채권단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밖에 세계 3위의 자동차메이커인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이탈리아의 피아트도 대우차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GM이나 포드와 비교할 때 인수의지가 높지는 않다. 크라이슬러의 경우 대우차보다는 기술제휴를 해온 쌍용자동차에, 피아트는 대우차의 폴란드 FSO공장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삼성차, 프랑스 르노에 매각단계

대우자동차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삼성자동차의 경우는 이미 프랑스 자동차업체인 르노로의 매각이 확정된 상태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과 르노가 배타적 매각협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교환한 상태이며, 1월17일에는 실사단이 방한해 삼성자동차의 자산가치 산정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한빛은행 관계자 역시 “르노의 최고의사 결정기구인 이사회에서 삼성자동차 인수안을 통과시켰으며, 대우자동차 상용부문에 대해서도 인수를 타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 르노는 삼성차 인수대금으로 4,000억원 가량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삼성과 채권단의 기대에는 못미치는 것이지만 실사 등을 통한 자산가치 평가와 협상과정에서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시장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던 GM, 포드, 르노가 최근 들어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연간 140만대에 달하는 한국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일뿐만 아니라 한국 시장을 교두보로 아시아 시장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증권 김용수 과장은 “GM이나 포드자동차는 장기적으로 대우차가 생산한 소형차로 중국시장을 공략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21세기 생존걸린 아시아시장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는 미국·일본·유럽 등 선진국 시장의 경우 포화상태에 도달했으며, 향후 10년간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은 아시아 지역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GM, 포드, 르노 등의 경우 일본업체들이 80%이상을 석권하고 있는 아시아 시장에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21세기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GM이 최근 공개한 내부보고서는 그들의 위기감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GM은 보고서에서 “2006년까지 830만대의 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제외하고는 세계 자동차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며, 따라서 북미시장 이외에서의 매출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리려는 GM의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공략이 필수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GM은 또 “2007년이 되면 매출액 면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유럽과 미국시장을 능가해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며 한국, 호주,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주요 시장에서 향후 5년이내에 1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대우, 삼성자동차를 발판으로 GM, 르노 등이 상륙하면서 바야흐로 한국 자동차시장이 ‘독립’이냐 ‘종속’이냐의 기로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