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끓는 청춘과 하나뿐인 신체 마저 국가에 바친 사람들. 지긋지긋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상이군인들에게 새천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자신이 몸바쳐 사수했던 조국에 대해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리고 메아리 없는 이들의 울부짓음에 자신있게 답할 자 또한 누가 있을까.

서울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 신관 5210호. 월남 파병 맹호부대 출신인 오세창(53)씨는 3년2개월째 죽음과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의식을 상실한 지는 이미 10여년. 산소 호흡기와 목의 기도를 통해 강제로 투입하는 유동식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병명은 고엽제로 인한 뇌졸중. 3년전부터 하반신이 오그라드는 경식 현상까지 나타났다. 부인 홍금자(46)씨가 24시간 몇분 단위로 가래를 빼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큰일을 당할 처지다.

오씨는 월남에서 돌아와 10년째가 되면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착란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두통 때문이려니 하고 넘겼으나 96년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보훈 혜택을 받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당시 받은 보훈 등급은 2급. 97년부터 2차례 뇌수술을 받았지만 하반신 마비와 의식 불명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없다.

부인 홍씨는 이제 하나뿐인 아들(22)이 걱정된다. 아직까지 별 이상은 없지만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년째 무의식속에 있는 오씨.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로 면식은 없지만 같은 맹호부대 출신인 강영옥(52)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강씨는 69년 전투에서 총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잃었다. 77년 결혼해 현재 두 딸을 슬하에 두고 있다. 상이등급은 3급. 월 90만원 남짓한 연금으로는 생활이 힘들어 지금은 중고 트럭 한대를 구해 천호동 인근에서 군밤 장사를 하고 있다.

월 수입은 50~60만원 정도.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아내의 약값을 대고 나면 생활하기가 빠듯하다. 강씨 자신도 보훈병원에서 매일 진통제를 맞고 있다. 강씨는 지난해부터 몇몇 상이군인들이 추진중인 자립시설인 용사촌 허가가 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신체적고통ㆍ생계 이중고에 시달려

현재 국가보훈처가 보훈대상으로 선정한 국가유공자는 총 20만1,639명에 달한다. 이중 한국전쟁이나 월남전, 기타 공무 수행중 사망했거나 부상한 전몰순직자와 상이군경은 유가족(7만5,418명)을 포함해 12만8,330명. 아직도 5만여명의 상이군경이 신체적 고통과 생활고라는 이중의 적과 승산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보훈복지공단이 운영하고 있는 보훈병원은 이들 상이군경들에겐 더없는 안식처다. 상이 등급에 관계없이 모든 의료비가 무료여서 몰려드는 상이군경들로 항상 붐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끼리 만나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만도 큰 위안거리다. 이 병원에 들어서면 여느 병원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환자들이 50대 이상의 중년들인데다 팔다리가 절단된 이들이 유난히 많다. 병상은 총 800개로 종합병원 수준인데 입원실은 항상 정원 초과상태에 있다. 워낙 대기 환자들이 많아 정형외과의 경우 5~6개월을 기다리기가 일쑤다. 병상이 턱 없이 모자라 급한 환자부터 우선 응급실에서 임시 대기토록 한뒤 입원시킨다. 이 때문에 상당수 환자들이 불편하지만 통원치료를 하고 있다.

지난 주말 병원 로비에서는 한차례 소동이 있었다. 한 상이 군인이 손도끼로 병원 유리창을 깨며 난동을 부린 것. 일반 병원과 달리 종종 이런 소동에 익숙한 터라 사태는 곧바로 수습됐지만 이를 저지한 병원 직원이나 환자들 모두 씁쓸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소동의 장본인은 68년 월남전서 청룡부대원으로 전투에 투입됐다 지뢰를 밟아 오른쪽다리를 잃은 박성(50)씨. 몸관리를 소홀히 해 성했던 왼쪽다리까지 굽어지지 않는 뻗정다리가 된데다 양손도 거의 마비된 상태다.

이날 박씨는 “유공자 등급을 올려달라”며 소동을 벌였다. 수서 임대아파트에서 두자녀와 생활하는 박씨는 지난해 아내마저 교통사고를 당해 누우면서 생계비라곤 매달 86만원의 정부 보조금이 전부다. 박씨의 경우 그간 정부로부터 그간 대출을 많이 받은 터라 이자를 떼고 나면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는 매일 병원을 찾아와 마약성 진통제인 데매롤을 하루에도 3~5차례 맞는다.

정신도 혼미해 보호자를 동반해야 하는 박씨는 “머리에는 부비트랩 파편이 박혀있고 배에는 고엽제가 돌아다니는 이런 나를 1급으로 올려주지 않는 것은 정부와 병원 의사가 짜고 하는 짓”이라며 비난을 퍼부어 댔다.


대부분 연금에 의존, 근본대책 필요

국가유공자에 대한 지원 현황은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현재 5만여 상이군경중 월 100만원 이상(최고 118만2,000원)의 보상금(보훈연금)을 받는 1급 대상자는 전체의 4.2%인 2,331명에 불과하다.

반면 보건복지부가 정한 최저생계비(73만8,000원·3인 기준)에도 못미치는 월 60만원 이하를 지급받는 5급 이하가 3만8,523명으로 전체의 72.8%나 된다. 대부분이 연금에 의존해서는 최소한의 생계 유지도 곤란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이에따라 올해 보훈 예산을 총 1조2,464억원으로 전년대비 15.4% 증액했다. 종전 6급까지였던 상이등급을 7급까지 확대, 경상자 7,800여명에게 월 15만원에서 32만원까지 추가 보상금 혜택을 주기로 했다.

또 지난해말부터 유공자 11만4,000가구에 지급되는 기본연금을 7.5% 인상하고 고엽제 후유증 환자 대상을 두배 이상 늘리는 등 국가유공자 예우를 대폭 보완했다. 이외에 보훈대상자들에게 매달 등급에 따라 지급되는 보상금 지급과 의료보호, 대학까지 학자금지원, 보철구 지급과 보철용차량 세금 면제, 취업알선, 자녀 병역 특혜, 500만원까지 융자지원(이율 연 3~5%), 교통비 할인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런 지원책만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해진 이들의 빈자리를 메워줄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걸림돌 많은 용사촌 건립

상이군경들이 가장 원하는 것중 하나가 용사촌 건립이다. 용사촌이란 상이군경들이 함께 공동 생활을 하며 복지사업장을 운영하는 집단 주거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는 안정적으로 생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어 자립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용사촌으로 인정 받으려면 1급 상이등급 해당자 20명 이상이 동일 행정구역에서 집단 거주해서 복지공장을 운영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이런 걸림돌 때문에 실질적으로 용사촌 건립은 힘든 실정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형성된 26개의 용사촌 대부분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생긴 것으로 최근 몇년안에 생긴 곳은 거의 없다.

월남전서 양다리를 잃었다는 박상진(47)씨는 “지난해부터 70명의 회원을 모아 용사촌 건립을 추진중인데 정부가 전혀 지원을 해주지 않아 답보 상태에 있다”며 “현실적으로 정부가 먼저 시유지나 국유지 등을 싼값에 불하해주지 않으면 현재 여건상 용사촌 건립은 불가능하다”고 성토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용사촌이 상이군경들이 자활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의 하나이지만 예산과 절차상의 문제로 건립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대안으로 수원에 480세대 규모의 복지타운을 운영중이다”고 설명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상이군경들.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적절한 예우는 우리사회가 해결해야할 시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송영웅·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