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마술사 1호 이홍선씨의 '50년 마술인생'

빨간 스폰지 공이 두 개. 하나는 그가 쥐고, 다른 하나는 내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손등을 한번 툭 치더니 기껏해야 1, 2초전 공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펴보인다. 그런데 공이 없다. 처음부터 뚫어지게 지켜봤지만 아무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엔 내 손을 펴보라고 말한다. 시키는대로 슬며시 주먹을 펴자 내 손에서 튀어나오는 두 개의 공. 대충 예상을 하고서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쾌한 역습이었다.

“어른들 앞에선 차라리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제일 무서운 게 아이들입니다. 특히 초등학교 아이들 앞에서 마술로 박수를 받은 사람이면 그건 성공한 마술사라 보면 됩니다. 워낙 산만한게 아이들이라 정말 재미있지 않으면 잠깐 쳐다보다 금새 딴짓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시선을 끝까지 모은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거든요. 또 한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어찌나 눈들이 밝은지 조금만 서툴러도 금새 알아채지요.”


2,000여가지가 넘는 마술, 국내마술사의 산역사

한국프로마술사 1호 이흥선(76)씨. 호적상으론 이미 한참전에 은퇴했을 법한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만큼 왕성하고 돈도 잘 버는 현역이다. 작년 8월부터 금강산유람선 봉래호 전용마술사로 자리잡아 현재 6개월째 활동중이다.

여느 때 같으면 같은 배에 타야만 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마침 봉래호를 수리하는 문제로 그는 때아닌 열흘간의 휴가를 받은 참이었다. 일 때문에 집에 돌아와 본지도 반년만에 처음이라는 그에게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을 선상생활에다 객지생활이 힘들지 않냐고 묻자 고개를 젓는다. “고생이란걸 몰라요. 한번 배를 탈 때마다 배가 떠나는 날 한번, 돌아오는 날 한번, 모두 두번 선상에서 공연하는데 마술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면 늘 힘이 나지요. 좋아하는 것도 나이마다 다 달라요.

아이들은 뭔가 신기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제일 좋아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웃게 해드리면 가장 즐거워해요. 반면에 젊은 사람들은 사람을 베거나 자르는 마술을 가장 찾지요. 그래서 요즘 배가 출발할 때면 미리 손님들 나이 분포부터 알아보고 준비해가죠.”

이흥선씨의 또다른 이름은 알렉산더 리다. 한때 야간업소 공연때 친해진 가수 고 김정구씨가 붙여준 예명이다. 그는 실제로 국내마술사에 관한 한 국사책속의 알렉산더 만큼이나 역사적이다. 프로마술사 1세대의 원로일뿐만 아니라 아직도 다른 국내마술사들이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고난도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비둘기 마술과 일명 ‘일루전 마술’분야. 빈손에서 비둘기를 10여마리나 끊임없이 나오게 한다거나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도록 일정한 도구속에 사람을 들어가게 한 후 부분절단, 그리고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하게 걸어나오게 만드는 등의 대담성과 특수도구를 필요로 하는 마술은 그가 거의 독점적인 노하우를 자랑하는 특기다.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해 현재 그의 손에서 빚어지는 마술만 크게 잡아 2,000여가지, 자잘하게 응용한 것들까지 합치면 만가지를 넘기는 것도 어렵지않다.


만드는데 일가견, 고물상뒤져 재료 직접구해

특히 그는 마술도구를 직접 만들어내는 사람으로도 두드러진다. 그동안 제작한 도구만 그의 집 창고 두칸을 가득 채웠다. 얼마전 한 방송사의 쇼프로그램에 빌려주기까지 한, 사람 자르는 대형 마술도구도 그가 직접 설계도까지 그려가며 목공소에 부탁해 만든 것이다. 못 하나, 문짝 틈 하나만 잘못돼도 폐품이나 다름없는 것이 마술도구이므로 여간 정교하고 공이 많이 드는 작업이 아니다. 얼핏봐선 별 어려울 것도 없는 사각통 하나를 만드는데도 사흘이나 걸렸다. 그때 목수들이 툴툴거린 소리. “이거 하나 만드는 시간에 문짝 몇십개는 짰겠네.”

사실 직접 만들려면 못 만들 것도 없는 이씨다. 원래부터 고치고 만드는 덴 손재주가 타고난 그다. 옛날부터 그의 집안엔 새로 산 것이 별로 없다. 단골로 드나드는 곳이 고물상. 거기서 구한 고장난 라디오며 선풍기, 난로 등을 뚝딱 고친 뒤 몇십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말짱하게 쓰는 것들이 많다. 언젠가는 5,000원을 주고 산 한 음악재생기계를 말끔하게 고쳐 5만원을 받고 청계천상가에 되팔아본 일도 있다. 가히 ‘요술손’이다. 요즘도 시간만 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시내를 돌며 하루종일 고물상을 뒤지는 게 이씨의 주요 일과중 하나. 그 화려한 무대의 마술도구나 재료도 고물상 출신이 대부분이다.

“마술기구를 만드는데는 뭐든 못 쓰는게 없어요. 중요한 건 재료가 아니라 창의력이지요. 사실 창의력이나 머리를 좋아지게 하는데도 마술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마술을 하다보면 자연히 순발력이나 머리회전이 빨라지고, 계속 머릿속으로 뭔가 궁리를 하게되면서 늘 두뇌운동이 되거든요.”


서커스단 유랑생활중 대만마술사에 배워

마술사가 되기 전 그는 주위에서 알아주는 근육질의 운동선수였다. 서울 용산에서 출생, 어릴 적부터 철봉에 매달리는 게 좋았고, 열일곱살 무렵엔 아예 밤새도록 동네 철봉에 매달려 땀을 쏟을 만큼 특히 기계체조엔 남다른 애착과 소질이 있었다. 철봉체조, 물구나무서기, 텀블링 등이 그의 주특기였다. 곧 그를 눈여겨 본 신광서커스단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그는 일찍이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나중엔 스스로 차력까지 배워 특기를 보강, 전국의 가설극장을 돌며 3년에 한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한 거친 떠돌이생활이었지만, 젊은 혈기에 몸 고달픈 줄도 몰랐고, 일 자체도 즐겁기만 했다. 그러다 마술을 접하게 된 것이 26세 무렵. 인정을 베풀다가 얻은 우연이었다.

“서커스단 일로 알고 지내던 대만 마술사 ‘미스터 엑스’가 어느날 급하게 전화를 했어요.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누가 돈을 훔쳐가 갑자기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를 곧바로 우리집에 데려와 밥도 먹이고 재우면서 제가 다니던 가설극장에 소개해 일거리도 주선해줬더니 어느 날인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게 너무 고맙다며 마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예요. 차력이나 체조는 나이들면 못한다, 차라리 마술을 배워두면 늙을 때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자기가 직접 가르쳐주겠다고 말이죠. 그렇게해서 마술을 알게 됐는데, 그 사람 말이 정말 옳았어요. 지금도 그의 생각을 많이하죠. 어떻게보면 그가 오히려 제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약 2년동안 훈련을 받았다. 비둘기 마술도 미스터 엑스로부터 배운 것. 그후 처음으로 나선 첫 마술공연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레퍼토리는 깡통에서 담배꺼내기와 종이를 찢은 것으로 국수를 만드는 것 따위. 관객들로부터 큰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차력사로 받은 박수와는 또 달랐다. 그 우뢰와 같은 환호속에 빠져 그는 본격적인 마술사의 길로 나서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1970년대 군위문공연이 가장 신나는 기억

군부대 위문공연을 다니던 1970년대 무렵은 그중에서도 가장 신이 났던 시절이다. 워낙 외부인들의 방문이 뜸한 이들이라 그런지, 군인들의 호응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 열렬한 환영에 감격한 그는 더욱더 열심히 군부대며 교도소 등지를 찾아다녔고, 그 때문에 곳곳에서 감사패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서커스가 사양길에 접어든 1980년대부턴 야간업소로 일터가 바뀌었다. 서커스단외에 마술사가 선택할 수 있는 무대라곤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초원의 집, 무랑루즈 등 한동안 심야영업이 전격금지되기 전까지 서울의 웬만한 밤무대엔 거의 서보았다. 방송에 출연한 것도 그때. ‘비밀의 커튼’이나 ‘쇼 비디오 자키’등 당시 몇몇 TV프로그램의 마술코너에 그가 고정출연하면서 금새 이름이 알려졌다. 인기도 수입도 치솟았다. 한창 바쁠 땐 하루 출연하는 야간업소만 평균 예닐곱군데. 오후6시경 집을 나서 다음날 새벽4시가 돼서야 귀가하곤 했다.

마술사라곤 외국인 밖에 상대하지 않던 서울의 한 호텔에서는 어느날 출연용 코끼리가 아프자 임시로 그를 불렀다가 결국 장기계약까지 맺으며 그를 붙든 적도 있다. 아무리 인기있는 마술도 3개월마다 꾸준히 바꿔놓는 등 이씨의 남다른 장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총수입만해도 일반 대기업 과장급 사원의 1년치 봉급을 그는 단 한달이면 벌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일체의 부업없이 봉래호 일만 하는 요즘도 한달 평균 수입 약 600만원. 세무서에서조차 “70대 노인이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버냐”고 물을 만큼 그는 예나 지금이나 왕성한 ‘경제인구’다.

“하지만 많이 버는 만큼 지출도 큽니다. 특히 마술도구를 만드는데 나가는 돈이 적지 않지요. 돈보다 중요한 건 어쨌든 일입니다. 저를 보시는 분들은 종종 그런 말을 하시죠. 제가 무대에 나오면 벌써 제 얼굴에 ‘나는 프로마술사다’라고 적혀있는 게 보인다구요. 사실, 야간업소에서 공연할 때에도 간혹 술 취하신 분들이 공연히 시비를 건다거나 가끔 곤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공손하면서도 확실하게 관객들을 휘어잡는 힘이 제 나름대로 있거든요. 마술만 잘하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잘 어루만질줄 알아야 합니다.”


외손주, 딸과 함께 마술3대

롯데월드 마술전용극장에서 6년간 일한데 이어 이번 봉래호 일을 맡게 됐다. 비록 몸은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 됐지만, 마음만큼은 더 단단한 마술가족 3대로 뭉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같은 프로마술사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외손주 김정우(30)씨는 이미 마술계에선 널리 알려진 인물. 여기에 김씨의 어머니이자 이씨의 맏딸인 이영숙(55)씨까지 최근 가세하면서 명실상부한 3대 마술가족을 이루었다.

현재 김정우씨는 금강산유람선 풍악호에서 활동중이고, 이영숙씨는 이씨의 마술조수로 봉래호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외의 ‘알렉산더 패밀리’는 이씨 부인 오금순(72)씨와 큰 외손주 김준오(34)씨, 그리고 네명의 제자들. 이들의 아지트는 약 2년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매직바 ‘알렉산더’다. 바(Bar)라곤 하지만 조금도 술집 특유의 끈적거림이 없는 이 곳은 사실상 마술에 관심있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전용공간이다. 매일밤 손님들을 대상으로 간이 마술쇼를 펼치거나 이벤트를 펼치는 등, 주 관심사 자체가 마술에 있다. 애초부터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 마술인구 확산을 위해 벌인 일이라 수입으로 치면 그리 신통한 장사도 아니다.

하지만 부대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마술교실에 최근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면서 이들에겐 또다른 청신호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다할 국내 프로마술사 숫자는 많아야 10명 이내,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국내마술계의 현실에서 머지않아 마술붐도 기대해 볼만 한 것이다.

없던 새도 불러오고, 있던 공도 깜쪽같이 감추던 이씨지만, 그러나 조물주의 기술엔 당할 재간이 없었을까.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 마술솜씨는 여전해도 잔 주름 진 얼굴에 예전같지 않은 청력이 황혼을 말하고 있었다.

이씨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 큰 외손주 김준오씨는 “이제는 힘든 객지생활보다 제자들 교육을 위해 일하시며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가족다운 염려를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돌아온 이씨의 대답. “젊었을 때는 워낙 객지생활이 길어 싫어하던 집사람도 요즘은 ‘당신같은 고령에도 이렇게 찾는 사람들이나 일할 곳이 있다는 게 아주 자랑스럽다’고 하지요. 저도 이 생활이 좋습니다. 이번 계약은 3월까지지만, 앞으로도 할수만 있다면 계속 현장에 있고 싶을 뿐입니다.”

그 조손 사이의 틈에 끼어, 나는 아까부터 여기서 나가기 전 꼭 빨간 공 마술을 배워 나도 곧 주위 사람들의 ‘얼을 빼놓으리라’던 결심조차 까맣게 잊어먹고 말았다. 정말 그 사라진 빨간 공 하나는 언제 내 손에 옮겨온 것일까.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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