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씨는 양(梁)씨 부(夫)씨와 더불어 수천년을 이어온 제주의 지배씨족으로 그 역사와 전통이 이어져왔다. 고씨의 본(本)은 제주를 대종으로 “장흥, 개성, 연안, 용담, 의령, 고봉, 옥구, 김화, 횡성 등 10본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제주에서 분적한 지파(支派)로 단일본이며 장흥 고씨, 개성 고씨 등은 파로 공칭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는 옛 고구려의 왕실이 고씨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고주몽(高朱蒙:東明王)의 후예들이 오늘날 전하지 않는데 대해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高·梁 ·夫 삼성의 시조탄생에 대해서는 탐라의 개벽을 말하는 삼성신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高, 梁, 夫 삼성의 시조탄생설화는 고대사회의 ‘桓因 桓雄 단군설화’ ‘朴 昔 金 삼성 시조설화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써 제2의 형태인 지신족설에 속하고 그 배필인 삼신여에 관한 설화는 제5의 형태인 외래족설에 속하는 것이다.

삼성신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영주고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초에 영주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흘연서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솟아 나왔다.

장은 고을나(高乙那), 다음은 양을나(梁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였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 동해에서 나무상자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바닷가로 내려가 본즉 그속에 삼신여가 타고 있었다. 삼신인은 나이차례로 삼신여를 각각 배필로 삼고 삼신여가 갖고온 송아지와 오곡종자로 씨를 뿌리고 가축을 길러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탐라개국신화는 삼신인 가운데 고을나는 고씨, 양을나는 양씨(뒤에 개성), 부을나는 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신인은 활을 쏘아 각기 소거지를 가렸는데 고을나의 소거지는 제일도로 지금의 제주시요, 양을나는 제2도로 지금의 대정이며 부을나의 소거지는 제3도로 정의이다. 이때부터 산업을 일으키고 목축을 시작해서 나날이 부력(富力)이 증진하여 드디어 인간체계를 이룩하였다. 또 이때부터 900여년동안 인심이 좋아 고씨로 임금을 삼고 국호를 모라라하였다.’

‘고씨세록’은 ‘탐라의 군주는 고을나로부터 45세까지 대대로 고씨가 세습해 오다가 46세 末老가 고려에 입조하니 이가 곧 모든 고씨의 중시조가 된다. 고을나왕에서 45세 고자견(高自堅)왕까지를 왕세기’라고 수록하고 있다.

특히 이 왕세기중에서도 국위를 선양한 시대는 15세 고후(高厚)왕으로부터 45세 고자견왕 시대라고 수록하고 있다. 동국역대사, 조선역대사약, 국사대관 등에 보면 ‘고려 태조21년에 탐라국왕 고자견이 태자 말로를 고려에 보내어 작(爵)을 하사 받았다’고 기록한 점과 고씨세록의 기록으로 미뤄 탐라국왕은 고씨가 세습했다는 것이 사서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고말로의 고려입조에 훨씬 앞서 고을나 15세손이 되는 고후, 고청(高淸), 고계(高季)의 3형제가 신라전성기에 탐진(지금의 전남 강진)을 거쳐 신라에 입조했는데 이때 객성(客星)이 남쪽에 나타나 이를 가상히 여긴 신라왕이 맡이인 고후에게 ‘성주’, 둘째인 청에게 ‘왕자’, 막내인 계에게 ‘도내(徒內)’라는 작위를 각각 내렸다고 한다.

이같은 기록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성주’란 신라때부터 탐라도주의 칭호로서 독립적인 위치를 누렸으며 고려숙종 10년(1105)에 탐라가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존속하여 그 작위를 세습했다고 전한다.

한편 백제 동성왕이 498년 탐라가 조공하지 않는다 하여 정벌하려 하자 탐라가 그정을 미리 알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한 일이 있다. 이후 다시 독립상태로 있다가 고려 태조8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고 939년에 고말로를 보내어 입조케 했었다.

고씨의 세계는 이 고말로의 아들인 維, 綱, 紹 3형제가 모두 고려에 등과함으로써 비로소 벼슬의 실이 트이게 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탐라의 고씨가 속속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고씨의 중시조 고말로의 후대에서 고씨 종문은 영곡공(제주 고씨파) 장흥백(고씨파) 문충공(옥구 고씨파) 양경공(개성 고씨파) 상당군(청주 고씨파) 성주공(제주 고씨파) 화전군(횡성 고씨파)등 20여파로 나뉘어진다. 양경공파의 파조 고령신을 비롯한 그밖의 파조들이 고말로의 후손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에서 벼슬하다 돌아오지 않고 적당한 연고지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그 세거지를 따라 분적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영곡공파가 으뜸가며 성주공파, 전서공파와 더불어 제주 고씨의 3대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고말로의 장자인 고유(高維)는 고려 정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는 정2품인 우복야라는 벼슬을 지냈다. 고위벼슬에 오른 탐라의 최초 인물인 셈이다. 이를 계기로 고려때 고씨는 9상서와 12명의 한림 등 많은 현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높은 관직에서 활약하였다.

말로의 손자로 고려 선종5년(1088)에 출생한 고조기는 예종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남도지방를 다스렸는데 그 기풍이 청백하고 공명정대하였다.

제주 고씨 중앙종문회(02)755-0919 고대현(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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