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12·12’ 에 대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의 회고는 차이가 있다.

YS는 NYT회견문제로 국회제명을 하루 앞둔 1979년 10월 3일 저녁 장충동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공관에서 그를 만났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제명·구속은 물론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며 기자회견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토록 종용했다.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거요. 김부장도 조심하시오.” “총재님 또 뵙겠습니다”는 김부장의 말에 YS는 “김부장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거요”라며 헤어졌다. YS의 예언대로 이 두말은 들어 맞았다.

글라이스틴대사는 YS의 제명으로 10월5일 미국에 소환되었다가 18일 브라운 국방장관과 함께 한국에 다시왔다. 브라운장관은 카터대통령의 지시로 정치적 억압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충고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측의 공개적 비난과 특히 대사를 소환했던 일, 언론을 동원한 여론 악화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글라이스틴이 본 박대통령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글라이스틴은 “한국 정부의 자세를 옹호하면서도 악화되고있는 사회불안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박대통령의 그런 자세를 전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

10월26일, 글라이스턴은 YS와 대사관저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오랜시간 침울한 분위기였다. YS는 “국민들이 궐기해 박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미국대사는 달랐다. 그는 “현정권이 혼란을 겪고 있지만 정권에 위협이 될 정도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자정, 그는 박대통령의 피격 절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YS는 새벽 4시30분께 재미동포로부터 “총재님, 지금 텔레비전을 보고있는데 박대통령이 암살되었답니다”는 전화를 받고서 그의 죽음을 알았다.

두 사람의 회고록에 나온 격변의 순간을 포착하는 장면은 우리의 대통령 후보자들과 주한 미국대사의 정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있다.

10·26 7주후에 발생한 12·12 쿠데타, 그후의 ‘서울의 봄’을 앗아간 ‘5·17’비상사태 등에 대한 정보의 차이는 더욱 컸다. 그러기에 우리의 대망의 주자들에게는 대책이나 전술이나 전략이 있을 수 없음을 잘 나타내 주고있다.

YS 회고록에서 ‘12·12’나 ‘5·17’은 몇쪽에 지나지 않는다. 글라이스틴의 회고의 주요부분은 ‘12·12’, 80년 4월 전두환 중장의 중앙정보부장서리 임명, ‘5·17’등이다.

YS에게 79년 12월12일은 신민당 총재 가처분 신청이 취하된 날. “전두환을 비롯한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이른바 ‘숙군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요 “‘시해사건조사’를 구실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체포한 날”이다. 이날의 사건은 10·26이후의 ‘힘의 공백기’에 종지부를 찍은 하극상의 쿠데타였다”가 결론이었다.

YS가 5·17로 ‘유리안치’되기까지 한 일은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대선주자들의 “심판을 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 김대중 대통령 후보자와의 결별을 둘러싼 정쟁에 휘말린 점이다. 12·12후 권력의 핵심이 된 신군부에 대한 전략이나 설득, 경고나 접촉은 없었다. 회고록에도 그런 대목은 없다.

글라이스틴은 달랐다. 12월12일에는 아직도 연금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와 회담했다. 미 국무부가 11월에 김대중과의 접촉재개를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10·26에서 12·12까지 7주간이 “미국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한 기간”으로 보며 민주화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일 초저녁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8군 벙커에 도착한 그는 처절한 패배감에 쌓였다. 위컴은 12월초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육사 11,12기 장성사이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려 주었었다.

8군 벙커에서 밤샘을 한 그가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는 “민간정부는 명목상 유지되고 있지만 모든 징후는 일단의 야심적인 젊은 장교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보여주고있다. 12·12사태는 미국의 관점에서는 나쁜 소식이다.

박정희대통령의 18년에 걸친 강력한 독재아래서 놀랄만큼 단결을 유지해 온 한국군이 이제 반란행위에 휩쓸려 치유에 몇년이 걸릴 내부 반목을 불러왔고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선례를 만들었다. 결국 미국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한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한국인들이 인식하는데 있다.”

글라이스틴은 전두환 소장을 곧 만나 “북한의 위협에 비추어 헌법이 규정한 민간정부 유지의 중요성과 정치 발전에 관한 일반 국민들의 여망을 전할 것임”을 보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12·12 반란군들은 한·미연합사의 명성을 무시했다. “12월12일 밤 미국의 존재는 사실상 무시돼 있었다”가 그의 이 날에 대한 결론이다.

그는 ‘무시된 미국의 존재’를 되살리기 위해 신군부 지도자인 전두환소장을 12월 14일 만나야 했다.‘강력하고 활기에 넘치며 극도로 야심 만만한 인물’이었다. 위기를 자신의 출세를 위한 기회로 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정치적 탄압을 옹호하는 ‘유신의 아들’이었다. 권력의 중심부에 서있는 자신을 유치할 정도로 즐기고 있는 야망과 편협한 신념에 사로잡힌 강력한 권위주의적 인물.’ 전두환에 대한 인물평은 YS나 글라이스틴이나 거의 같다 하겠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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