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고씨 족보에 따르면 성주공(星主公) 여림(汝霖)은 고려중엽인 원종 때의 무인(將軍)이며 중시조 고말로(高末老)의 6세손이다.

병부상서 적(適)의 큰 아들로 성주작을 물려 받았다. 원종11년(1270) 8월에 항몽투쟁의 삼별초는 진도에 근거를 옮겨 용장성을 쌓고 장병을 모집하는 등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여 새로운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이에 고려원종은 몽고의 강요에 따라 ‘三別抄’를 평정하게 되었으니 김방경(金方慶)을 전라도 추토사(追討使)로 삼고 여림공(汝霖公)과 양동무(楊東茂)를 장군으로 삼아 여몽연합군으로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해안방비가 튼튼한데다 몽고군은 해전에 약해 후퇴하고 말았다.

한달후 9월에 고려왕은 제2차 진도 총공격을 감행하기전에 삼별초의 후퇴에 대비하여 여림공을 대장으로 삼아 탐라를 방비케 하였다. 여림공은 영암부사인 부장 김수(金須)와 함께 장정 1,000여명을 이끌고 화북포로 상륙하여 300리에 환해장성(여림공의 관직명을 따서 시랑성이라고 함)을 쌓고 수비를 철저히 하였다.

여림공은 고향인 탐라가 싸움터로 변하지나 않을까 항상 염려하였으니 노부모를 만나뵙고 말하기를 “불초소생은 오직 왕명을 받들어 고향땅에는 전화가 미치지 못하도록 목숨을 다하여 막아 싸우겠습니다”하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하였다고 한다. 한편 ‘三別抄’는 진도가 함락당할 때를 대비하여 탐라에 거점을 다시 구축하고자 선발대를 보내었으니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장병을 이끌고 1270년 11월 명월포로 상륙했다.

이 때 여림공은 ‘三別抄’의 입도를 저지하고자 관군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금덕전투에서 패하여 부장 김수 등 많은 장병을 잃고 후퇴하고 말았다. 며칠후 송담천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였으나 고여림장군이 전사하자 사기를 관군은 패퇴했다. 1273년 2월 중군원수 김방경이 160여척의 전함에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와 홍피두성에서 김통정장군이 이끄는 삼별초를 평정하였으며 공의 부친인 고적이 유총관이 되어 탐라인들을 안무하였다.

이로써 삼별초의 39년간 항몽투쟁은 끝나고 싸움도 멎어 이 땅에 다시 평온이 찾아왔으나 치욕적인 99년간 몽고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제주고씨 일문은 탐라의 개국시조인 고을나왕(高乙那王)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명문거족인 것은 이미 세상이 널리 알고 있으며 그 시초에 대해서는 ‘高·梁·夫’ 삼성신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을나왕의 15세손 高厚, 高淸, 高季 등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하여 각각 성주(星主)왕자 도내 등의 작호를 받았다.

그로 부터 다시 헤아려 46세손 고말로(高末老)를 제주고씨의 중시조로 삼게 되었다,

제주고씨로서 내륙에 진출하여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고말로의 아들 유(維)로부터 였으니, 그가 처음 “남성시(南省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문하시중우복야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중서시랑평장사로서 시문에 명세했으며, 그의 손자 적(高適)은 유총관 병부상서 벼슬을 지냈다.

10세손 인단(仁旦)은 탐라지휘사, 그의 증손 신걸(臣傑)은 호조전서를 역임하였다. 신걸의 3자 봉례(鳳禮)는 공조참의 벼슬에 이르렀다. 15세손 득종(得宗)은 조선초기에 대표적 인물로서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밖에도 상당군 공익(公益)은 예부상서, 양경공 영신(令臣), 양현공, 장흥백 중연, 이부상서 문충공 경(慶), 상당군, 화전군, 인비(仁庇) 등 고려때 9상서 12한림의 명현이 배출되었다.

제주고씨는 많은 명현달사를 배출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수는 50만여명으로 인구순위 21위에 해당하는 명문거족이며 탐라의 왕족이다.

제주고씨는 정계, 재계, 학계 등에서 많은 인물이 삼성사(三姓祠)를 중심하여 고제철회장, 전총리 고건 서울시장 등이 중심이 되어 위선사업에 정진하고 있다.

고씨중앙종문회는 서울 용산구 용산동 5가 1의13에 있으며 전화는 (02)755-0910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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